‘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중이 절이 싫다고 훌쩍 떠나기만 하면 별무소용이다. 그렇게 떠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여기서 중이라 함은 비단 승려뿐만이 아니며, 절은 단지 사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단체, 조직 등 이세상이 절이고, 그 속에서 인연맺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 바로 중이라는 비유로 알아들어야 한다. 절이 싫어질 만큼 절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상황에 대처하는 중의 유형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황으로 나눠 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절에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면서도, 못된 주지 옆에 바짝 붙어서 신도들을 기만하고 등치는데 앞장서는 중이 있다. 제일 문제가 심각한 중이다. 이런 부류의 자들이야말로 제 자신의 호의호식을 위한 방편으로 중질을 한다고 해도 구업이 되지 않을 만큼 하는 불교 내 독버섯으로 하루빨리 제거돼야 할 마구니들이다. 둘째, 절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등등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절 밥만 축내는 중이 두 번째로 딱한 중이다. 이 같은 중은 할 일 없는 무심 도인이 아니라 정견
개가 멍멍 짖고,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가 멍멍 짖고 고양이는 야옹한다는 것은, 개와 고양이의 일이 아니라 인간들이 바라보는 개와 고양이의 일일 뿐이다. 어쨌거나 개가 멍멍 짖고 고양이가 야옹하듯이, 개는 수표를 외면하고 쉰내 나는 족발 뼈다귀를 물고 달아나지만 사람은 쉰내 나는 족발 뼈다귀를 외면하고 수표를 줍는다. 수표를 좋아하는 사람의 업식(業識)이 옳다면, 뼈다귀를 좋아하는 개의 업식 또한 그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사람이 수표를 선택하는 것이 개가 뼈다귀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개도 지혜로워져서, 뼈다귀 보다는 수표를 물고 정육점으로 달려가서, 신선한 살코기와 뼈다귀를 마음껏 사 먹기를 바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개를 사랑한다는 명목아래, 무조건 개에게 뼈다귀 보다 수표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개가 뼈다귀를 좋아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비난하면서, 수표에 관심을 가지라고 꾸짖는 것은, 그 동안 개와 맺어 온 인연의 끈마저 끊어지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진정으로 개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개를 인정한 뒤, 개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기도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불교인들은 부처님께, 또 다른 종교인들도 각자 각자가 믿는 절대자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될수록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도 성취를 위한 헌금이나 불전도 불사한다. 원하는 일이 중요할수록 간절한 마음과 함께 헌금 및 불전의 액수도 비례해서 커진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나 부처님께 도와 달라는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 그 소원이 참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일인지, 이 세상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고 이 세상을 극락정토로 만드는데 합당한 일인지, 심사숙고한 뒤에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 무조건 하나님이나 부처님께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참다운 기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도란 무엇일까? 자신의 원하는 바를 무조건 이루게 해 달라며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기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거래에 다름 아니다. 간절한 마음
- 탈무드의 지혜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 돌아가는 도리에 통달한 지혜로운 현자들의 생각은 서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물론 말은 다르고 표현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그 말과 표현들이 지향하는 궁극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모세가 전한 율법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성서 다음으로 중요시되는 제2의 경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토대가 됨은 물론이고, 일상적 삶의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는 탈무드의 무수한 명언들은, 유대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까지 전파 돼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종교와 무관하게 전 세계인들의 의식 속에 알알이 수놓아진 채, 지구촌의 정신문화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무드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전까지 절대 그 사람을 욕하거나 책망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과 자신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동양의 가르침인 易地思之(역지사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친숙한 가르침이다. 탈무드는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손을 대고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은 마지막에
거고사추(居高思墜) 지만계일(持滿戒溢)이란 말이 있다. 높은 곳에 거처하면 떨어질 것을 생각하고, 가득 찰 정도로 가졌으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명언이다. 의역하면 지위가 높을 때는 그 지위가 없어 졌을 때를 생각해서 보다 더 겸손해야 하고, 부자일 때는 방탕과 교만함을 경계하면서 가난하고 힘이 약한 이웃을 배려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역(周易)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내려갈 길밖에 없음을 후회한다’는 뜻의 항용유회(亢龍有悔)란 효사(爻辭)를 통해, 부귀영달이 극도에 달한 사람은 쇠퇴할 염려가 있으므로 언행을 조심하고 삼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임하고, 부자가 가난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돌보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항용유회와 관련, 공자(孔子)님은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높아 교만하기 때문에 자칫 민심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등과 얽히며, 기존 1조원대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 한 손바닥 소리 - 절에 가면 가장 친숙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목탁소리와 종소리다. 심신유곡의 산사를 찾아가던, 도심의 포교당을 찾아가든 마찬가지다. 목탁소리는 딱! 하면서 일순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망상들을 끊어내며 ‘지금 여기’에 실존하도록 해준다. 일생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갈등을 유발시키는, 마음속에 덕지덕지 남아 있는 생각의 앙금들이 꼬물꼬물 올라오는 것을 즉시 사라지게 해 준다. 종소리는 꽝! 하고 울리면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공명시킨다. 종소리는 목탁소리와 달리 그 여운이 아주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좁아터진 마음을 온 세상에 두루 두루 퍼져나가도록 한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은 막힘없고 걸림 없는 넓은 순수 의식,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선 원만하고 지공무사한 우주 의식이 된다. 특히 절에 가서 종소리가 꽝하고 울리는 순간을 만나게 되면, 그 소리와 하나가 된 채 점점 작아지는 소리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소리 없는 소리’를 만나게 된다. 끝내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다하는 곳에 이르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소리’를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일’이 저절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