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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연재소설 = 제7의 왕국 제56회




권우상(權禹相) 연재소설 - 7의 왕국 제356

 

第七王國

 

 

 

그래서 너희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니 이제 궁궐을 떠나 마음대로 자유롭게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자 어서 각자 돌아 가거라..”

왕의 말이 떨어지자 궁녀들은 일제히 엎드려

폐하 !”

하면서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너무나 뜻밖이라 기뻐서인지 아니면 대궐을 떠나기 싫어서인지 궁녀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궁녀들은 그동안 정들었던 대궐을 떠나기가 아쉬운 듯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의 정을 나누며 대궐을 떠났다.

 

왕은 대궐을 떠나는 궁녀들에게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했다.

일백 명의 궁녀들을 해방시킨 현종은 새롭게 나라 살림을 꾸리기 위해 유윤부를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유방헌을 평장사로, 강조(康兆)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진적을 형부상서 참지정사로, 류진을 상서 좌복야로, 왕동영을 상서 우복야로, 최항을 좌산기상시로, 김심언을 우산기상시로,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김려를 병부상서로, 문인위를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여 조정을 일대 쇄신하였다.

 

그리고 연등회를 부할하여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등 민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현종(顯宗)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거란(契丹)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삼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고려(高麗)의 목종(穆宗)이 폐위된 줄 모르고 있던 거란왕(성종)에게 동여진(東女眞)의 왕 나사불이 보낸 사신(使臣)이 급히 알현을 청해 왔다.

동여진의 나사불 왕이 보낸 사신이 폐하에게 급히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신하의 말을 듣고 거란왕은 동여진 사신의 접견을 허락하였다. 동여진 사신은 거란왕 앞에 나섰다.

동여진 사신 율무(律武)라 합니다. 동여진의 나사불 왕께서 이 서신을 거란국왕께 바치라 하였습니다

 

 

서신을 받아 본 거란왕(성종)은 잠시 안색이 굳어졌다. 측근 신하가 물었다.

폐하 ! 무슨 내용입니까 ?”

고려의 왕이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면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

강조(康兆)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켰다는 것이다

강조는 고려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장군이 아닙니까 ?”

그 자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죽였다는 것이다

폐하 !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십 만 대군이 있습니다. 고려를 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고려를 칠 것이니 장수들을 소집하라 !”

예 폐하 !”

 

 

거란왕(성종)은 동여진 사신에게 돌아가서 거란이 고려를 칠 것임을 동여진왕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동여진의 고변으로 목종(穆宗)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거란왕은 10107월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고려에 파견하여 목종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종(顯宗)은 측근 신하인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 폐립(廢立)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契丹)과 고려(高麗) 양국 간에는 전쟁 분위가 고조되었고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여 현종(顯宗)은 문무백관들을 급히 소집하여 이렇게 말했다.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로 삼고 상장군 안소광을 도병사로,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니 군사 30만 명으로 거란군을 방어토록 하라 !”

왕의 명령을 받은 장수들은 출정식을 마친 후 병력을 이끌고 곧 바로 도성을 떠나 통주(평북 선천)로 향했다. 그리고 병력 30만으로 하여금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하여 거란군 침략에 대비하였다.

 

 

동여진이 고려왕(목종) 폐위 사실을 거란왕(성종)에게 고변한 이유는 10102월에 좌사랑중 하공진이 동여진을 공격하자 실패했고 그 보복으로 유종이 조공차 화주관에 온 여진인 95명을 죽여 버렸기 때문에 고려에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로 고려 조정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하공진과 유종을 귀양 보냈다.

이 무렵 여진은 동여진과 서여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서여진(아라불도 왕)은 고려와 관계가 좋았지만 동여진은 관계가 나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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