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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군주가 충신의 말 듣지 않으면



칼럼

 

 

                        군주가 충신의 말 듣지 않으면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나라가 위(), (), ()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을 때 촉왕 유비는 충신 제갈량의 조언으로 위(), ()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나라를 잘 이끌어 갔다. 그러나 유비와 제갈량이 죽고 유비의 아들 유선(劉璿)이 촉왕이 되자 충신의 말은 듣지 않고 간신(환관)의 말만 듣다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다. 유비에게는 아들 일곱 명이 있었다. 맏이는 유선(劉璿)이고, 둘째는 유요(劉瑤), 셋째는 유종(劉琮), 넷째는 유찬(劉璨), 다섯째는 유심(劉璕), 여섯째는 유순(劉恂), 일곱째 막내는 유거(劉璩)였다. 일곱 아들 가운데 유심만이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기민하기가 남달랐고, 나머지는 모두 나약하고 어질기만 하였다. 유비는 맏아들 유선을 후계자로 정했고, 유선이 촉왕이 되면서 위()와 오()의 침략이 빈번했다. 제갈량과 같은 전략가가 없는 틈을 타서 촉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위나라 장군 등애(㲪艾)는 촉나라를 연일 공격하고 있었지만 촉나라 장군 강유(姜裕)는 위나라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위나라 군사는 강유의 뛰어난 전술에 말려 여러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자 위나라 장군 등애는 첩자를 촉나라 조정에 밀파시켜 황호(환관)를 매수하여 촉나라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강유를 다른 장군으로 교체하도록 만들었다.

 



촉왕 유선은 황호(환관)의 말대로 촉군의 지휘관 강유를 다른 장군으로 바꾸었고, 강유가 물러나자 부하 장군들이 슬픔에 잠기자 강유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께서 간신 황호의 말만 믿고 술과 여색에 빠졌으니 내 보기엔 화가 멀지 않았네. 이제 곧 위나라 군사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근심할 게 무엇인가?” 강유가 촉군의 지휘관에서 물러나자 촉군은 연일 위군에게 패하자 수도(성도)가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황호는 유선에게 제대로 전황을 알리지 않은 채 여전히 태평세월로 연회를 베푸는가 하면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려 나라의 길흉을 물어봤다. 무당이 위나라는 곧 물러갈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았지만 전황의 소식은 촉나라에 매우 위급하게 전해졌다. 위군의 공격이 수도턱 밑에까지 와서야 다급해진 촉왕 유선은 무당을 찾았으나 무당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유선은 제갈첨과 그의 아들 제갈상에게 7만의 군사를 주어 위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촉나라 군사는 모두 흩어졌다. 제갈첨도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칼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싸울 군사가 없는 촉왕 유선은 위나라 등애 장군에게 항복 문서를 전달했다.

 



이처럼 간신의 말만 듣다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군주는 중국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백제 의자왕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삼국을 통일하여 진()나라를 건국한 사마염은 어떨까? 220년 위()나라가 건국할 때부터 계산하면 꼬박 60, 208년 적벽싸움으로 천하가 셋으로 니뉠 조짐을 보였던 때로부터 72년이 지난 뒤에 통일되었다. 세월을 거슬러 후한의 통치가 뿌리채 흔들리기 시작한 184년의 황건(黃巾)의 반란부터 계산하면 96년이나 100년 가까이 군벌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영웅들이 나라를 조각조각 떼어 나누던 시대가 끝나고 또 다시 하나의 정부, 한 황제의 명령이 전국 곳곳에 닿는 세상이 되었다. 30세에 황제가 된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앞으로 나아갈 목표를 잃고 날마다 수 많은 미녀들의 치마폭 속에서 술과 섹스로 나날을 보내자 신하들도 점점 향락으로 부패하기 시작했고, 사치스런 풍조가 도를 더해갔다. 사마염의 외삼촌인 왕랑과 그의 손자인 왕개(王愷)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백성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야말로 사마염 측근들의 부패는 점점 나라를 멸망속에 몰아 넣고 있었다. 왕개가 엿물로 가마를 씻으면 그의 측근 석숭은 촛불로 밥을 지었다. 왕개가 비단 휘장을 집앞 길에 40리를 깔면 석숭은 비단 휘장을 50리나 깔았다. 이런 나라가 오래간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눈이 먼 것이 아닐까. 이처럼 나라가 부패하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는 52년만에 멸망했다. 시황의 진()나라 역시 고조, 이사 등 간신 때문에 멸망했다. 그후 君主不聽忠臣諫. 難免宮中受劍鋒(군주가 충신의 말 듣지 않으면 궁중에서 칼날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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