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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연재

만농의 우리고을이야기-「梅鶴亭」

낙동강 칠 백리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고산(孤山)아래 매학정(梅鶴亭) 퇴계학파와 쌍벽인 기호학파의 조종(祖宗)율곡 이이(李珥)선생이 다녀간 글

 
기호학파의 태두로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격몽요결 을 지었으며 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瑀)는 매학정주인 황기로(黃耆老)선생의 사위로 매학정을 500년 전에 방문

訪梅鶴亭
栗谷 李珥
若木平明車載脂。幾度登山復渡水。孤山迫在大野頭。洛江煙波汀沚。披榛覓路竹扉。小童應門迎我喜。玲瓏朱閣絶點塵。儉而不陋奢不侈。空階梅未返魂。九淸音時入耳。童言主人在田野。邨逕隔十里。須臾報道主人歸。八窓執同徙倚。曾聞傾蓋便若舊。此言從知非妄矣。星山邂逅適我願。一見便許以知己。況復相逢物外境。世間交道安足比。斜陽半出破煙。遠水金波起。江分沙島燕尾開。樹列汀洲翠支蓋。逍遙縱目逸興飛。千里江山通一視。蒼然瞑色滿虛亭。收拾風光猶未已。遙看漁火數點明。江邨盡入熹微裏。閉戶挑燈動息。永夜淸談詩隱。先生不是俗中人。生憎逐利求名士。自言卜築尋形勝。況是先人有基址。十年之計樹百卉。春來繞舍皆桃李。腐餘糞土夢已斷。明時貧賤吾不隱。時將醉興作草。蛇怒驚風滿紙。簞瓢足可長謂。肯效區區慕蟻。嗟余誤落紅中。役役未免牽僞累。擧世徒知鷄肋味。秋風誰憶魚美。先生一言眞起余。放浪江湖吾所。矢將身世老漁樵。不欲醉生還夢死。今宵酒不須辭。破除萬事從此始。

방매학정
율곡 이이
약목 쪽에서 오는데 길이 편편하나 좋지 아니하여 수레에 기름도 치고 몇 번이나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넜던가.

선산 땅의 고산(孤山)은 아득히 넓은 들 한 가운데에 있고 낙동강의 물안개와 파도는 물가를 휘감았네. 가시덤불 헤치고 손님을 찾아 대나무 사립문을 두드리니 젊은 아이가 문 앞에서 맞이하며 나를 기쁘게 인도하네. 영롱한 붉은 집은 빼어나고 더럽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한듯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네.

텅 빈 계단과 매화는 영혼을 돌이키지 않고 학(鶴)의 깊은 늪 속에 맑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네. 젊은 아이가 주인이 밭에 있다고 말을 하는데 촌길은 구불구불 십리나 막혀있네. 모름지기 곧 주인이 돌아온다고 말을 하여 들어가 문을 열고 함께 기다렸네. 일찍이 들으니 이곳을 옛날과 같다고 하니 이 말이 끝내 망령되지 않다는 것을 알겠네.

고산(孤山)아래 매학정은 아득히 넓은 들
가운데 있고, 더럽지 않고 검소하고 누추하지
않고 화려한 듯 하며 사치스럽지 아니하며

성주(星州)에서 우연히 만나 나는 강조하기를 나와 말 놓기를 원하였는데 하물며 다시 서로 세상의 밖에서 만나니 인간세상의 도(道)로 사귀는 것과 어찌 비교하리.

석양의 산허리는 안개 낀 푸른 산을 깨뜨리고 돌에 부디 치며 흐르는 먼 물줄기는 금빛 물결을 일으키네. 강은 모래톱으로 나뉘어져 제비꼬리처럼 열리고 나무는 물가에 늘어서 지류를 덮어 푸르네. 소요하면서 눈을 돌리니 감흥이 일어나고 천리의 강산도 한 눈에 들어오네. 창연한 푸른빛은 텅 빈 정자로 들어오고 광명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여전이 끝이 없네.

살아서는 이익을 쫓고 이름을 구하는 것을
미워하고, 백 그루의 꽃나무를 심어 봄이 오면
집을 두르니 모두 복숭아꽃 오얏꽃 이라

멀리는 고기잡이배의 불빛 몇 개가 보이고 강촌(江村)은 모두 희미한 속으로 들어오네. 문을 걸고 등불을 돋우며 숨을 고르니 긴 밤 그윽한 자리에서 맑은 얘기를 나누네.

선생은 세속의 중인(中人)이 아니라 살아서는 이익을 쫓고 이름을 구하는 것을 미워하였네. 스스로는 경치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지었는데 하물며 선생<황기로선생의 조부 상정공(橡亭公)>께서 남기신 정자 터에 십년의 계획은 어떠하였는가.

백 그루의 꽃나무를 심어 봄이 오면 집을 두르니 모두 복숭아꽃 오얏꽃 이라네. 충분히 썩은 거름처럼 꿈은 이미 끊어지고 맑은데 내 가난함이 부끄럽지 않다네. 이때에 장차 취하여 흥취일어나 화단을 희롱하니 뱀 은 성을 내고 구렁이는 놀라고 글씨는 종이에 가득하네. 도시락밥이라도 만족하여 오랫동안 갖출만하고 보잘것없는 사모하는 마음 다하고 싶네.

아! 나는 잘못 세속에 태어나 하는 일 마다 누추함을 면치 못하네. 세상을 다만 닭과 돼지고기 맛만을 알고 가을바람 속에 누가 농어의 맛을 기억할까.

선생의 한 마디 말이 진실로 나를 일으켜 강호(江湖)를 방황하며 나는 발돋움 하네. 맹세코 장차 나는 세상의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사람으로 늙어 술 취한 듯 살아서 다시 꿈속처럼 삶을 하직하고 싶지 않네. 오늘 아침의 술잔을 사양치 않을 것이니 온갖 일 모두 잊고서 처음처럼 따르리라.

▲이이<李珥, 1536∼1584(중종31∼선조17)>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 뒤 15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뒤 1555년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 1558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였으며, 전후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뒤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쳐 1568년(선조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1574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15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15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15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1582년 이조판서가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졸하여 자운산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퇴계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배향되었고,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豊德)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黃州)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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