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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민주주의, 횡설수설

김병연 시인/수필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말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없던 시대에는 왕이 나라의 주인이었고, 그 왕을 위한 백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가 발전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벽을 더 넘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1945년 해방 전에는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고, 주인인 왕이 백성을 지켜내지 못해 수 없는 고통을 백성이 당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의 틀이 갖추어진 것은 1919년 독일에서 제정한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한다. 이 헌법에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20세 이상의 남녀에게 평등하게 선거권이 주어지며, 대통령제를 선택하여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라는 것에서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민주주의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통해 받아들였지만 수없는 정치적 시행착오가 70여 년에 걸쳐 반복되어 왔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사람의 옷과 같은 것이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의 옷을 이 사회라는 몸에 입혔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다수의 사람이 참여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때에 따라서 직접 투표를 하기도 하고 다수를 대신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하기도 한다.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고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 땅에 수없는 역사가 흘러왔다. 과거의 역사를 바라보면 미래의 역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과거의 잘못된 문제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방법이 최선이지 정답(正答)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를 갖고 있다. 누구나 쉽고 빠르게 익혀 뜻을 전하는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문맹을 물리치지 못하면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쉽게 뿌리내릴 수 없다.

 

  우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70여 년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언론과 정보가 그 책임을 맡아왔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언론을 통제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봉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언론을 통제하고 감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 국민의 정보 활용량은 인터넷 속도만큼 빠르고 다양해졌다. 국민의 눈과 귀가 그만큼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방법과 속도도 그만큼 빠르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치는 배척해야 할 때이다. 민주주의는 통치가 아니라 국민주권을 지켜내는 책임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평등해야 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가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하고, 소외되고 불편한 자가 더 많은 국가의 사랑을 통해 삶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더욱 공정한 세상이 되도록 민주주의(民主主義)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향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항상 되풀이되는 문제점을 낳고 그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사회적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정치인은 지역감정을 부추겨 권력을 탐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지방자치제는 지역이기주의만 부추기는 현상을 낳아 왔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어야 이 세상을 바꾸어 낼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물은 단단한 돌에 부딪쳐 깨져 보고 큰 소리도 질러보며 바다로 흘러갈 때 눈부신 태양(太陽)을 품어낼 수 있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인을 옹립하여 군림하게 하는 제도가 아니다. 우리는 5천 년 역사를 지녔다. 하지만 이제 겨우 민주주의를 시작한 것은 70여 년이다. 그동안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백성의 다수로 살면서 천한 신분을 지녔었다. 지금 우리는 좋은 글과 민주주의라는 좋은 제도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 민주주의가 이 나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무만 빽빽이 들어선 숲이 아니라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는 아름다운 숲을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한다.

 

  태강즉절(太剛則折),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다. 나무도 사람도 마냥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숲 속의 갈대와 고무나무가 서로 자기가 더 강하다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었다. 고무나무는 갈대를 보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는 네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하며 비난했다. 때마침 갈대가 반박하려 할 때 갑자기 강풍이 불어왔다. 갈대는 허리를 굽히고 바람에 몸을 맡겨 뿌리가 뽑히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에 꼿꼿이 맞선 고무나무는 뿌리째 뽑혀버렸다. 고무나무는 왜 쓰러진 것일까. 강풍에 맞설 용기는 있었지만 유연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대는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인성을 흑백 논리로 말하면 강함과 유연함, 이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따라서 강함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연함을 지녀야 하는가는 모든 사람에게 던져진 화두이기도 하고 성공 처세술의 미션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연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것이고, 그것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후천적 노력이 필요하며, 삶의 유연함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나약한 인생을 강하게 만들어내는 영양제(營養劑)이기도 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세 살 때 생긴 버릇을 여든 살이 되어서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한번 들인 버릇은 여간해서 고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며, 어렸을 때 생긴 잘못된 버릇을 사소한 버릇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나중에 큰코다칠 수도 있으니 유소년기 가정에서의 자식에 대한 부모의 교육이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하는 매우 중요한 속담이다.

 

  저출산은 교육 문제와 맞물려 있다. 대부분 한 가정에서 아이 1명을 낳다 보니 아이는 황제처럼 길러진다. 자식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중한 것과 바른 습관을 길러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소중하다고 해서 자식을 왕자나 공주처럼 떠받들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부모가 대신해 준다면 자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하지 않고 타율적(他律的)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부모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자식이 살아남으려면 오직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一流大學)을 나와야 된다고 믿고 있다. 일은 내가 모두 해줄 테니 너는 공부나 잘하라고 채근하며 자식을 책상(冊床)으로만 몰아넣은 것은 아닐까.

 

  마음속으로는 아이들이 주어진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알며 어떤 일이든지 솔선수범(率先垂範)해서 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식은 그렇게 키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인생(人生)은 결국 습관(習慣)이다. 그러므로 어떤 습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인생 최대(最大)의 과제(課題)라는 빌게이츠의 말처럼 습관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학습능력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아무리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에 길들여진 사람은 결코 인재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할 것이다.

 

  화가인 코끼리가 친구들을 초대했다. 풍경화를 그린 후 자신의 그림에 대한 평(評)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나름 그림에 안목이 있다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가장 먼저 유명한 미술 평론가인 악어가 자신의 느낌을 밝혔다. 

“그림은 아주 훌륭한데 나일강이 없어서 좀 아쉬워.”

 

  이어서 바다표범이 말했다. “나일강(Nile江)이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그런데 반드시 있어야 할 눈과 얼음은 어디 있는 거야?”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돼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흠(欠)잡을 데 없이 완벽(完璧)한 그림이야. 개인적(個人的)으로는 배추도 한 포기 그려 넣었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 같군.”

 

  친구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코끼리는 자신의 그림에 친구들의 생각대로 나일강, 눈과 얼음, 배추 등을 모두 그려 넣었다. 수정작업이 끝난 후 코끼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그들의 평을 기다렸다. 

 

하지만 화가 코끼리의 예상과는 달리 친구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이게 무슨 그림이야, 완전 엉망진창이군.”

 

  대체적으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정을 받는다. 그렇다고 고집불통(固執不通)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흔들리거나 바꾸지 말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입장을 정확하게 밝히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물론 신중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고 판단(判斷)하는 훈련(訓鍊)이 반드시 선행돼야 할 것이다.

 

  사람의 지식과 능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의사결정(意思決定)에 있어서 타인의 의견과 도움을 적절히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이다. 화가 코끼리는 주위 친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관(主觀)과 소신(所信)을 잃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그림의 주제를 놓친 셈이다. 이렇게 초심이 흔들렸던 이유는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일을 하기 전에 타인의 반대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타인의 의견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중시한다면 타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으로 작용해 결국 자아(自我)를 잃게 될 것이다. 물론 복잡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지혜롭고 현명하게 알아차리며 실수 없이 살아가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결정적 판단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사결정(意思決定)에 스스로 사고(思考)하지 못하는 것은 타고난 의존적 성격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자신감(自信感)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보다 타인을 더 믿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 설사(設使)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모든 일을 생각만 할 뿐 할 건지 말 건지, 한다면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주관(主觀)이 없는 사람, 또는 자기 소신(所信)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타인(他人)의 생각에 지배(支配)당하지 않을까?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과 쉼 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소신(所信)을 지키고 어떤 경우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다수가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의 관점(觀點)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기도 하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조직이든 리더(leader)의 영역은 뚜렷한 주관과 소신이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맺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중심(中心)에 두어야 한다. 리더가 중심이 흔들리게 되면 조직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비록 어렵고 고단한 현실이지만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타인의 믿음과 신뢰를 지켜내는 일은, 스스로를 챙기고 단속해야 할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主觀)과 소신(所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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