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ㆍ예술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 다라국의 후예들 제3부 제74회

 

 

권우상(權禹相) 장편 역사소설 제3부 제74회

 

 

다라국의 후예들

 

 

 

부성지는 주인 고팔부를 사랑채 뒤쪽 헛간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참 안타까운 일이구만, 하지만 어쩌겠나. 사람 팔자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운명일세. 생각해 보게나. 말은 왜 졸지에 놀라서 도망을 하며, 말 고삐를 잡은 놈은 졸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설사 말이 뛰어서 낙마를 하였기로서니 떨어져서 다치기나 할 것이지, 왜 그 자리에서 죽는단 말인가, 그러니 이게 다 타고난 사주팔자라는 것일세, 무엇보다도 자네 딸에게 장가를 못들어서 원한이 된 서한세가 있기 때문일세, 그러니 두 말 말고 내가 지금 가서 서한세로 하여금 관복을 입고 초례청으로 들어가게 할테니 죽은 신랑은 잊어버리고 그림 잘 그리는 화가 사위나 보도록 하게 어떤가?”

고팔배가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니 많은 사람들 앞에 창피 당하기는 마찬가지요, 딸은 혼례 준비를 했으니 이미 과부가 된 셈이었다. 고팔부는 체념한 듯이 남의 말 하듯 입을 열었다.

“모르겠네, 자네 말대로 하게 나는 구경이나 하겠네.”

부성지는 옳지 됐다 하고 즉시 고팔부의 집 외양간에서 말을 한 필 끌어오라 해

서 올라 타고 채칙질을 하여 서운세 집으로 급히 달렸다. 서운세 집에 도착한 부성지는 미친 사람처럼 서운세를 일으켜 옷을 입게 하고 관복을 입힌 뒤 자기가 타고 갔던 말에 올려 앉히고, 동네 하인들을 불러 배종하게 하고 자기가 후행이 되어 폭풍같이 고팔배의 집으로 들어섰다. 이 모양을 본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심지어 하인 중에서는 길을 막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팔배의

“다들 막지 말고 물러 나시오!”

하는 호령 한마디에 물러났으며, 신부를 초례청으로 내어 보내는 신부 어머니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도 가장(家長)이 하는 일이라 어찌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의아해 했지만 혼례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홀애비 삼취(三娶)에 신부의 나이가 어려 부부의 짝이 기울어도 어지간해야 노소동락(老少同樂)하는 셈을 친다고 해도 이처럼 서로의 나이가 너무 기울고 보니 보는 사람도 송구할 지경이요, 신부의 모친은 초상을 당한 듯이 애처로운 울음만 꺼이꺼이 울고 있었고, 집안 사람들은 저마다 까닭없이 홀애비 노신랑 서운세를 미워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신랑이 오는 것을 서운세가 죽인 것도 아니며, 그 신랑을 서운세가 밀어 젖히고 자기가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싫던 좋던 어쨌거나 혼인을 했으니 서운세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다. 이것이 모두 부성지의 덕택이라고 생각하자 서운세는 세상에 이런 친구도 흔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날 밤이 되어 화촉동방의 불이 밝혀지자 신부의 모친은 은근히 그의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우리 딸이 인물이 박색이요, 사지가 병신이요, 침선이 남만 못한가요, 비록 오던 신랑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도 차차 보아서 다른 집으로 여봐라 하는 듯이 총각한테 시집을 보낼 것이지, 이제 열 일곱된 어린 것을 마흔이 넘은 홀애비한테 똥 걸레 버리듯 줘버리니 대체 딸을 시집 보내자는 거요, 아니면 먹지 못할 쉰떡을 쓰레기로 버리자는 거요?”

그 말에 고팔배는 발끈했다.

“듣기 싫소, 제 팔자에 오죽하면 첫 남편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겠소, 이번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시집을 잘 갔으니 아무 말도 말고 나중 일을 두고

보시오.”

혼인한 지 사흘이 지나자 어린 신부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마치 나이가 상당한 부인보다도 단정하고 머리가 영특하여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알아 차리었다. 게다가 얼굴도 빼어난 미인이었다. 이런 여자가 옆에 있자 서운세는 다시 화필(畵筆)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운세의 그림 솜씨는 삽시간에 다라국(多羅國) 전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림으로는 먹고 살 수 없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서운세의 부인 고씨(高氏)의 나이가 열 아홉이 되자 첫 아들을 출산하였다. 서운세는 아들 이름을 서량(徐亮)이라고 지었다. 서량이 태어난지 일년이 겨우 지난 후였다. 고씨는 서량이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잠을 깨울 요량으로 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나 서량의 얼굴은 이미 사색으로 변해 있었고 전신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계속>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