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서 대한제국 당시 의병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의 5촌 조카 허형식(1909~1942)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대구보훈청에 신청한 후 장기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서훈추진위원장은 이번 5월 27일(월) 일창 허발 애국지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국가보훈처에 접수시켰다.
일창 허발은 왕산 허위선생의 재종형 범산 허형의 둘째 아들로 구미시 임은동에 태어나 재종숙부 왕산선생의 13도창의군 활동 시 의병활동에 군자금과 무기조달 등 궂은 일로 도왔으며, 그 후 1915독립운동에 있어서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임은동 식솔과 함께 만주도 망명하였다.
일창 허발은 1918 북경정부파 발기인 참여, 부민단 초대단장을 지낸 종숙부 성산 허겸과 함께 부민단 단총으로 만주교포 교육 및 제반업무를 담당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 후 독립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들어와 이시영 명의의 국채권으로 서울, 경남, 전남지역 동지들을 만나 활동하는 중에 1933년 대구경찰서에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1920년 경신참변 시 북만주로 이주하여 일창한약방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 동지들 규합하였으며 일창한약방의 수익금으로 독립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내용은 민족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가 1930년대 초에 독립운동가인 외삼촌 '일창'(一蒼, 본명 허발)에게 수부선행'(水浮船行)이라고 쓴 4자의 한자성어 휘호로 증명되는데 이는 이육사가 만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던 외삼촌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이다.
범산 허형의 셋째딸이자 일창 허발의 누이 허길은 진성이씨 이황의 13대손 이가호와 결혼했으며 바로 허길은 이육사의 어머니이며 허발의 딸 허은(許銀)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인 임청각의 3대 종부이기도 하다.
왕산 순국 후 구미 임은허씨 일족 전체가 만주로 망명을 가면서 일제의 추적은 만주에서도 계속되었다. 왕산의 네명의 아들들은 만주에서도 쫓기는 신세였고 이들은 도만 후 이명과 가명을 사용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창 허발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장기태 위원장이 대구신암선열공원을 밤에 묘소를 찾아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 ‘도만후 이명 玉’ 이란 문구를 보고 허옥으로 검색하니 일제의 수사자료와 재판기록 등 활동한 근거를 조금씩 찾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허옥의 이름은 석주유고(이상룡) 내용중에서도 그 이름을 확인했으며 안동 경북독립기념관에 東邱선생문집(이준형, 사돈간)에서 선생의 서신중에 許塗(허도)라는 이명을 찾기도 했다.
장기태 위원장은 “이분들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노출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여러 개의 이명을 사용한 점, 비밀과 기록을 남기지 않은 점, 특히나 가족에게도 활동에 관련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료 찾기에 힘들었다” 고 전했다.
또한 독립운동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일창의 동생 일헌 허규(이육사의 작은 외삼촌)는 서훈의 모든 조건을 채우고도 남았지만 유언으로 “통일이 되기 전엔 서훈 신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일창 허발의 독립 유공자 서훈 신청을 계기로 일헌 허규의 서훈 준비를 위해 아들 허술씨와 연락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