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 천.지.인.명(天地人命) 제3부 열 다섯 번째 (15)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3부 열 다섯 번째회 (15)

 

. . .

 

 

선대왕(무왕)께서 성열성 서쪽의 가잠성 동쪽 지역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억울하고 원통해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여 신라는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가잠성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 ? ”

가잠성 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수로 비록 신라가 전국의 군사로 포위하여 공격한다 하더라도 적의 혀를 찌르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예병이 가잠성을 공격해 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출동시켜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을 치는 것이 좋겠소 ? ”




신이 들으니 대야성(大耶城) 성주(城主) 김품석이 김춘추의 딸 소랑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서 원한의 대상이 된지 이미 오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수비가 한결 소흘해질 것이고 신라의 정예병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할 때면 대야성이 위급해 지더라도 갑자기 구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 질 것이니 이때 신라를 치고 들어가 멸망시키는 것이 아주 쉬울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대와 같은 지략가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었소 ! ”

 



의자왕은 성충을 상좌평(벼슬)에 임명하고 그의 전술에 따라 성충의 아우인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군 윤충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습작전으로 대야성을 공격하여 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의 비장(裨將) 금일을 생포한 후 금일을 이용하여 대야성 내부를 교란시켜 무너뜨리고 그 주변의 40여 성을 함께 얻었다. 대야성은 백제에서 신라의 서라벌로 가는 길목이며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따라서 대야성 함락은 신라(新羅)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었고 백제에게 기선을 제압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성충은 의자왕에게 신임을 받아 의자왕의 눈과 귀와 손발이 되어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직접 만나 화친조약을 얻어 내기도 했다.

 



성충이 고구려에 갔을 때였다. 이해득실을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군사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했다.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 보니 신라의 사신으로 김춘추가 와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공이 당나라와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나라와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번번히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니 수()나라가 그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나라와 연합하면 당나라는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략할 뿐 아니라 해상의 배로 군대와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 와서 백제의 쌀로 밥을 해서 먹어 가며 남쪽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러면 고구려가 남쪽과 북쪽 양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 신라는 동해안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의 군대와 군수물자 운반의 편리가 백제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친를 맺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 밖 고현 안의 열 개 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이 잘 아는 바이니 신라가 오늘에 와서 고구려와 군사동맹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내일에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 ”

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 신라의 김춘추는 방에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충은 마침내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런 성충은 궁녀의 수를 대폭 늘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자왕에게 간언하다가 옥에 갇혀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성충은 죽기전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마듸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나라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군사가 공격해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 : 탄현(炭峴)의 길목을 막아 적군이 그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 백강)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맞아야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서 의자왕에게 충고했다.

 



이 때가 의자왕 재위 16년이며 서기로는 6563월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백제의 조정은 한바탕 회오리 바람에 휩싸였다. 의자왕의 장남인 융()과 차남인 효()는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들이 외가(外家)끼리 권력 투쟁을 벌려 효()의 외가가 융()의 외가를 무너뜨리고 조정을 장악하면서 융()은 폐태자가 되고 그 자리를 효()가 차지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태자로 책봉된 융()이 효()로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융()을 추종하던 신하들은 제거되고 효()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대거 등용되어 권력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계속>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