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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인동 3.1 문화제"

'그날의 함성 감동 연출'

'제13회 특집'

 

(전국= KTN) 김도형 기자) 3월12일 오후4시 구미시 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에서는 『2016 제13회 구미인동 3.1문화제』가 개최됐다.

지난 2002년 구미인동3.1문화제 추진위원회 결성 후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인사모)' 주관으로 13년째 이어온 3.1문화제는 명실상부한 구미 지역의 대표 문화제로 자리잡았다.

인사모 회장인 윤영철 구미시의원은 3.1문화제 개최 의미에 대해 "봄날의 서정이 호국의 의지를 일깨우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의미있는 행사"라며 기념사를 통해 알렸다.

또한 윤영철 회장은 '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제막식에 앞서 "우리의 선조가 3월 12일 일제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한 곳으로 그 분들의 얼을 기리고 후손들이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 세운탑"이라며 그 뜻을 밝혔다.

인동 3.1문화제에는 남유진 구미시장을 비롯해 김태환 국회의원, 김익수 시의회의장과 시의원,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 및 지역 기관단체장과 학생,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순국선열에 대한 고유제를 시작으로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됐고, 3.1운동 당시의 역동적인 민족의 외침을 재현한 3.1재현극과 인동 3.12만세운동 당시의 감동의 순간을 느끼게 한 '횃불재연' 퍼포먼스 순으로 진행됐다.

한편, 식전 행사로 김차경 포에틱뮤지션의 공연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시극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은 3.1문화제의 내용을 한층 알차게 해 시민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홍보대사이기도 한 김차경 포에틱 뮤지션은 현재 경북선양사업회 회장을 맡아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김원식 선생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3.1문화제로 되돌아 보는 3.1운동과 구미인동3.12독립만세운동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 민족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항거해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세계사적으로도 영향을 끼친 비폭력 만세운동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만세 성명서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으로 알려졌으나, 직·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을 위해 준비한 이들을 모두 합친다면 민족대표 49인이라고 불린다.

 

3.1운동일 일어난 해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 7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으로 따진다면 조선 전체 인구 1678만 8천 400명 중 6.3% 가량이 만 만세 시위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3.1운동은 불시에 일어난 민족운동이 아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있기 전 한달 전인 2월 1일 중국 길림성에서는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 독립을 요구하는 무오 독립선언을 했고, 더불어 신한청년당의 2.8 독립선언으로 국내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한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1독립선언과 만세삼창으로 약속된 탑골공원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민족대표 33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을 낭독했다.

기약없이 모여든 학생 천여명은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만세소리를 울려 퍼지게 했고, 탑골공원 하늘 아래는 사람들의 모자와 작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휘날리며 감격의 기쁨과 민중들의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3.1인민봉기라고도 불리는 감동어린 이날의 거사와 함께 이어진 시위행진은 서울 전역에 8개구로 분산되어 길을 가며 독립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나눠졌고 점점 군중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3.1일만세운동 당일에는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군중들의 해산을 시도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 후 오후 6시가 되어 자진해산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총독부는 다음날 부터 독립단을 수색 및 체포했고 투옥된 숫자만도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약속했던 탑골공원에 불참했으며 다만 300미터 떨어진 인근 태화관에 모여 오후 4시 독립선언 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며 자진 체포됐다.

민족 대표33인 중 일부는 민족문제연구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경성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수개월 만에 전국을 비롯해 일본과 연해주 등으로 전파됐고 '실록 친일파' 기록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간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되돌아 본 구미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그 주역들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 경북이다. 그 중 경북 구미에서는 3월 12일 독립만세운동 거사가 시작됐다.

1919년 3월 12일 밤 8시경 서슬이 퍼런 일제 군·경들의 눈을 피해 어둠이 내리 앉은 인동의 뒷산에 휏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민족의 독립 염원을 담은 힘찬 외침 소리가 휏불의 빛과 함께 인동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인동향토지에 따르면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은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동지 이내성과 더불어 구미 진평동의 유지인 이상백의 집을 찾아와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할 것을 종용했다.

이상백, 이영식, 이범성, 이내성은 같은 동리의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등과 상의해 모두의 찬성을 얻었고 거사일은 3월 12일로 약정 후 의거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를 준비했다.

거사일인 3월 12일 낮 지사들은 오후 8시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예고했고 필사해 둔 독립선언서를 동리의 곳곳에 붙임으로서 동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날 저녁 뒷산에 모인 동민들의 숫자는 무려 300여 명이었고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군중 앞에 나타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앞당기기 위해 적극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파했다.

살벌했던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 인동 뒷산에서는 휏불을 든 군중들의 함성이 독립을 향한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밤이 깊도록 이어진 만세 시위에 일 군경들에 주동 인물 8인은 체포됐고 군중들은 강제 해산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3월 14일 밤 9시, 이영식 동지와 같은 대구 계성고 학생 김도길은 인동 청년 유지 박봉술, 김성윤과 함께 200여 명의 동민들과 뒷산 정상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을 향한 민족의 끈기와 항일에 맞서는 의지를 알렸다. 주동한 인물들 역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당시 인동 3.12독립만세운동의 주동 인물들은 시대의 아픔에 분노한 피끓은 젊은이들이었고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지사들은 다음과 같다.

이상백(34세), 이내성(27세), 이영래(18세), 임점석(25세), 임용섭(21세), 박명언(47세), 권영해(35세, 목사), 이윤약(41세), 장상권(22세), 장주서(37세), 서기옥(42세), 임삼선(24세), 박근술(30세), 서천수(22세), 박순석(25세), 김성윤(25세), 박봉술(27세), 박삼봉(28세), 박금출(27세), 장역직(31세), 권경보(29세), 장준현(27세)

이들 중 이내성 선생은 비밀 결사단체인 대한광복단에 몸담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대구 조선은행 폭탄의거로 유명한 장진홍 의사를 광복단에 몸담게 함으로써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인동의 유서깊은 가문 인동장씨인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 장진홍 의사는 구미시 진평동 출신의 이내성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몸담으며 만주 봉천성과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항일전을 위한 준비를 했다.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김영범 교수에 따르면 장진홍 의사는 1919년 3·1 운동이 발발 후 일제 군경이 진압을 위해 전국 각처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낱낱이 조사해, 그해 7월에 인천항에 들어온 미국 군함 승조원 김상철 하사에게 자료를 넘겨 보고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각국에 알릴 수 있도록 했다.안타깝지만 김상철 하사가 장진홍 의사의 부탁을 실행에 옮겼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3.1운동의 역사적인 의의로는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와 한민족 말살정책의 근본적인 붕괴와 더불어 잔혹했던 식민통치의 실상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했고, 민족 독립의 의지를 다지게했다.

또한 대힌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마련을 비롯해 국외 독립군의 무장 투장의 전개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는 민족보존운동의 전개 뿐만 아니라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분야에서 새로운 차원의 민족독립운동의 바탕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훗날 1945년 8월 15일 강대국들이 인정한 해방의 밑바탕에는 한국민족 스스로의 실력으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3.1운동이 한국민족의 독립을 보장받게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여파는 식민지하 약소민족의 힘찬 봉기를 보여줌으로써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인도지나반도 제 민족과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쳐 세계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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