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이념 대립 고뇌하다 간 큰 인물 다만 서울대 미대 학생으로 미군정과 충돌 수감됐던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로 그 사유로 어림해 짐작해 볼 뿐이다. 월북 이후 김용준은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사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대 강좌장(교수)로도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1994년 북에서 발간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따르면, 근원은 1953년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5년까지 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미술사로 일했다. 학계에 따르면 근원은 이 시기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단원 김홍도’, ‘조선화의 표현형식과 그 취제 내용에 대하여’, ‘조선화기법’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북한 최고 화가로 평가받던 화가 변왈룡 등과 교유하며 창작 활동에도 매진했다. 참고로 근원은 1958년 공화국 창건 10주년 경축 국가미술전람회에 ‘강냉이’란 작품을 출품, 2위에 입상하는 등 그 자질을 발휘해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앞서 근원은 1957년 제 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자신의 대표적인 ‘승무’를 출품, 금메달을 받음으로서 명실공히 최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간다. 김용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승무’는 전통적 기법을 살리면서 아담하고 간결하게 대상 성격의 특징적인 면을 유감없이 표현한 작품으로 몸 동작에 실린 생동감과 율동적인 붓터치, 구도상 안정감 등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가다. 현재 모스크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작품은 북한이 조선화 분야의 대표작으로 손 꼽을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북한 작가 도록에 남아 전하는 작품 중 근원의 작품은 그리 많지가 않다. 1959년경 모스크바 전시를 위해 작품을 옮기던 중 비행기가 추락, 상당량의 작품이 유실됐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못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양미술 유입의 충격 속에서 동양화가 어떻게 자리 잡고 발전되어야 하는지 고심했던 근원은 월북 이후 미술사 연구와 창작에 열을 올리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적이나 죽음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력대미술가연보’ 등에 따르면, 근원이 미술사학자로 활동하다 1967년 11월 3일 쓸쓸히타계한 것으로만 적혀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는 전통적인 동양화를 발전시켜야 할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이론투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근원은 은은한 색체를 바탕으로 한 묵화를 고집했으나, 대부분 화가들이 화려한 채색화 편에 서는 바람에 중앙화단에서 점치 밀려난 것으로 보여진다. 김용준은 당시 자신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소련에 있던 화가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1955년 5월5일)를 통해 임시적으로 토로하고 있는데, “꼭 선생이 오셔야 내가하는 사업에 자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선생이 오신다면 나도 없는 틈을 얻어서라도묵화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그림도 그려 보구 싶습니다. 또 내가 당하고 있는 애로도 선생이 계시면 해결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략>” 북한 화단의 해게모니 장악에서 밀린 근원은 결국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 1967년 63세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북한 체류당시 근원의 옆집에 살았다는 김정일의 전 처형 성혜랑이 남긴 수기 ‘등나무집’에 따르면, 근원은 김일성에 대한 불경죄‘에 걸려 고민하다 자살했다고 적혀있으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일제기와 해방기 남과북을 아우러며 일세를 풍미했던 근원 김용준. 그는 분명 우리 향토가 배출한 자랑스런 인물이자 오늘날 다시금 되살려 놓아야할 우리 문화 예술사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김병종 서울대교수(화가)는 “좌우이념 대립의 현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았던 근원 선생이 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으로 간 뒤에도 조선화의 정체성이나 양식, 미의식 둥에 있어 발휘해 보인 예술혼은 그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만큼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가 더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