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왜 적대시 하는가?
권우상
명리학지. 역사소설가. 극작가
팔레스타인(Palestine)은 지중해의 동쪽 끝에 있는 땅으로, 한때 고대 이스라엘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 이 이름은 라틴어 팔라이스티나와 그리스어 팔라이스티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어는 히브리어 펠레셰트에서 유래한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펠레셰트(“블레셋”으로 번역됨)가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해안의 제한된 지역과 관련해서만 나온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의 헤로도토스와 그 후대의 세속 저술가들(필론, 오비디우스, 플리니우스, 요세푸스, 히에로니무스[제롬])은 이전에 “가나안 땅” 혹은 ‘이스라엘 땅’으로 알려져 있던 지역 전체를 가리킬 때 이와 같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땅은 적절하게도 약속의 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중세 시대부터는 이 땅이 종종 ‘성지’로도 불리고 있다.
이슬람교 경전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집대성한 코란(쿠란, Qura’n)이다. 코란은 610년부터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시된 것을 모은 것이며, 유태교, 기독교에 이어 나타난 셈족계의 종교로서 유일신의 계시에 근거를 둔것 같은 일신교 계통의 종교이다. 하지만 계전으로는 선행하는 두 개의 경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이야기로서는 재미있고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 마지막 종교로 등장한 코란은 이러한 면에서 보면 무미건조하다. 마치 육법전서의 법조항과 비슷하다. 코란은 약 7만8천 어휘로 구성되어 있고 신약성서와 비슷한 분량의 책이다. 흔히 코란은 무함마드가 집필한 책으로 알고 있지만 무함마드의 책이 아니라고 아랍어 전문가인 김용선(金容善) 선생은 자신의 저서 ‘코란(쿠란)’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코란은 무함마드가 자기의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타자(他者)의 의식중에 말한 신비스러운 언어의 집대성이라고 한다. 이 타자의 의식으로 말한 것이 알라의 계시이며, 이는 한꺼번에 내린 것이 아니라 질끔질끔 간격을 두어 약 20년 동안 긴 세월을 두고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코란을 보면 계시는 메카와 메디아 두 도시를 중시심으로 이루어진다. 메카는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황량한 나산(裸山)에 둘러 싸인 골짜기에 발달된 도시지만 상업의 중심지로 고대에는 굉장한 경제적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즉 레르시아. 바빌론. 이집트, 인도 등과의 교역이 성행했으며 이 국제무역의 통로로서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곳이 메카이다. 메카가 우상 숭배의 중심지인데 반해 메디아는 구약 성경적인 일신교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아랍측 자료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570년경 메카에서 태어났다. 쿠라이시부족 중심 하심가(家)가 그의 집안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6살 때 사망하자 고아가 되어 숙부인 아부따리브에게서 자라났다고 한다. 코란에도 반복되어 고아에 대한 주제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코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알라께서는 고아인 그대를 찾고 돌봐주지 않았느냐. 알라께서는 길 잃은 그대를 찾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지 않았느냐. 알라께서는 그대를 찾고 부자로 해주지 않았느냐.”라고 기술돼 있다.
그는 하지자와 결혼하여 15년 동안 평범한 세월을 보내다가 40살이 되었을 무렵 그의 아내가 정신면에서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고독과 명상에의 욕구가 때때로 발작처럼 일어나 그를 불안하게 하여 그는 메카 근교의 히라산의 동굴에 들어가 금욕생활에 들어갔고 이 히라산에서 그는 610년 계시를 받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코란의 곳곳에 전쟁을 부추기는 말들이 자주 나온다. 코란 216 : “싸움은 그대들에게 과해진 의무이다.” 코란 244 : “알라의 길을 위하여 싸워라. 알라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아신다는 것을 알라.” 등이다. 이런 내용은 기독교의 박애사상과 불교의 자비사상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史料)을 보면 이슬람력 5년에 이슬람교와 유태교의 충돌로 전쟁을 한 적이 있다. 또한 라비아 근해에는 예로부터 해적의 소굴이 많았다. 이슬람교의 성전인 ‘코란’에도 ‘모든 배를 강탈하는 왕’이라는 말이 나오며, 홍해 입구의 페림섬, 아라비아해의 소코트라섬 등도 해적의 본거지로서 알려졌으며, 가장 이름을 떨친 곳은 페르시아만 방면이며, 그 중에서도 카타르 반도에서 아랍에미리트의 라스마산담 곶(串)에 이르는 지역은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해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근의 주민을 총칭하여 자와스미라고 한다는데, 이 말이 해적의 별명이 되었을 정도였고, ‘그들의 생업은 해적행위, 그들의 낙은 살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116년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4세기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世)가 대토벌을 한 바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슬람시대에 와서도 해적의 폐해는 끊이지 않았으나, 영국인이 페르시아만에 진출한 1818년 이후 이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해적민(海賊民)의 추장들과 트루스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도 해적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교와 테러조직 IS은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