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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명작 중편소설 = 천강홍의장군 <마지막회>

 

 

권우상 명작 중편소설 = 천강홍의장군 <마지막회>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은 마두성(청도)의 성주인 장세이(張世伊)에게 1천의 의병을 보내 일본군과 대적하게 했습니다. 2천의 일본군과 싸우는 1천의 의병부대의 치열한 전투는 처음에는 막상막하로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성 아래에서 위로 향해 총을 쏘고 의병들은 성위에서 독화살을 쏘고 청환과 총통 등 각종 중화기를 한꺼번에 쏟아 붓기 때문에 아래서 위로를 쳐다보고 싸워야 하는 왜군으로써는 여간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전투가 개시되자 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고, 이로 말미암아 죽고 다치고 도망치는 일본군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려 6시간 걸쳐 치룬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은 열세에 몰려 희생자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크게 패하였고, 이 때 살아서 도망친 일본군은 백 여명에 불과하고 거의 전멸되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병력을 증강하여 1593년 3월에는 경남내륙 일대에 있는 왜군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는 작전에 들어갔다. 이 작전으로 일본군의 수는 급격히 줄었습니다. 게다가 남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 하면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군수품 보급로가 차단되어 일본군의 보병은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한 곽재우의 장군휘하 의병부대는 더욱 활발하게 내륙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남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군과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의 보병은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군수품이 전달되지 않으니 내륙에 있는 일본군 보병은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투항하는 일본군이 갈수록 늘어났고 투항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전투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 병력이 조선에 와서 일본군과 싸우자 일본군은 조선과 명나라 두 나라 군대와 싸워야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에는 2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주둔하여 부녀자 납치나 약탈을 자행하고 있어 의병부대로서는 이들을 소탕하는 일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전세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일본으로 철군할려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경남 밀양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곽재우 장군은 양림간(밀양)에 집결하는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곽필승 부장과 함께 2만 5천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소탕작전에 나섰습니다. 이 전투는 지금까지 있었던 어느 전투보다 병력의 규모 면에서 가장 컸습니다. 총지휘관은 곽재우 장군이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키가 6척이나 되고 체격이 건장하여 일본군에게는 위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예도 출중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북쪽에서 내려온 일본군은 양림간(밀양)에 속속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기마병이었습니다. 왜장(倭將)은 ‘마케다 사부로(竹田三郞)’였습니다.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양림간(밀양벌판)에 집결하면서 두 나라 기마병은 서로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붉은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칼을 든 곽재우 장군의 늠름한 모습에 의병들은 전의에 불타 올랐고, 곽재우 장군을 호위하는 마상(馬上)의 곽필승 등 다른 부장들의 모습도 기개가 넘쳐 흘렀습니다.

때는 1594년(선조 30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지도 2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 -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 진영에서는 <朝鮮軍 義兵隊 郭再佑 大將軍>이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곽재우 장군은 일본군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유격전으로 기습공격으로 싸웠습니다. 일본군에 비해 의병부대의 병력수가 적고 일본군은 주무기인 조총으로 싸우지만 의병은 칼과 창, 화살로 싸워야 했고, 노획한 조총도 있었지만 대부분 청환(포탄)이나 총통 등 중화기도 그리 많지 않아 일본군의 조총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도 다수 갖게 되었고, 실탄도 확보했고, 청환(포탄)과 총통 등 각종 중화기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하면서 병참선이 끊어져 내륙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아 조총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실탄이 없어 사용 수 없는 무용지물의 장난감 총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전투수행 능력을 간파는 곽재우 장관은 일본군과 전면전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철군설(撤軍說)이 나돌면서 일본군은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였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혹시 일본군이 조총을 사용할 지도 몰라 조총을 가진 의병과 청환과 총통 등 중화기를 가진 의병에게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사격하고 발포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습니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곽재우 장군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의병들은 일제히 일본군을 향해 말을 달렸습니다. 어느새 왜왕 ‘마케다 사부로’는 곽필승 부장의 칼에 목이 잘리고 다른 부하들도 곽필승 부장의 칼에 전사했습니다.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일본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의병들이 가까이 바짝 붙어 싸우다보니 사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조총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의병들은 조총을 쏘지 못하도록 일본군과 바짝 가까이 붙어 창칼로 싸우자 일본군의 조총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더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는 바람에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실탄도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의병이 쏘는 총소리와 포탄이 터지면서 죽은 일본군의 시체 사이로 붉은 핏물이 도랑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조선 의병과 일본군은 피차(彼此)간 악귀(惡鬼)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사투(死鬪)로 전개 되었다. 혈전이었습니다.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일본군에게 불리했습니다.일본군의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싸울 군사가 없었습니다. 많은 희생자를 낸 일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후진에 있던 곽재우 휘하 의병부대가 합세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대패하고 50여 명만 겨우 살아서 가까운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곽재우 장군의 의병부대는 아주 멋진 대승을 낚아 올렸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다시 기강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했고, 이어서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진주까지 출병하여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습니다. 신출귀몰한 유격전과 함께 위계에 의한 기습공격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언제나 붉은 옷을 있고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곽재우 장군에게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뜻으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불렀습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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