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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명작 중편소설 = 천강홍의장군 <15>

 

 

 

 

 

권우상 명작 중편소설 = 천강홍의장군 <15>

 

 

                                  천강홍의장군

 

궤짝 속에 장치한 폭약이 터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틈을 타 곽재우 장군과 똑같은 복장으로 숨어 있던 곽필승 등 여러 부장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자 일본군들은 혼비백산 하면서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곽재우 장군의 나라 사랑과 백성에 대한 애정이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이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조방장(助防長)을 겸하게 될 무렵 의병부대 병력은 모두 3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는 의병도 있었지만 일분군 사상자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정규전이 아닌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는 유격전으로 싸우기 때문이었습니다.

1592 10월,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는 미타산에 매복하여 일본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진로를 바꾼 것으로 생각하고 전령을 보내어 일본군의 진로를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전령은 급히 말을 타고 달렸습니다. 잠시 후 전령은 일본군이 호미산성에 집결한다는 첩보를 곽재우 장군에게 전달했습니다.

왜장 ‘호리스게 시게지로(晧悧須介次朗)’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호미산성(虎尾山城) 공격하였으나 워낙 성(城)이 높고 견고하여 성벽을 뚫기가 어려운 데다가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의 반격이 거세어지자 성을 돌파하지 못했고, 성위에서 날려 보내는 불화살과 떨어지는 포탄에 맞아 일본군은 사상자가 늘어나자 왜장 ‘호리스케 시게지로’는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민나 바가야로. (모두 바보같은 지식..)

왜장 ‘호스리게 시게지로’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도망치듯 퇴각했습니다. 호미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곽재우 장군은 곽필승 등 여러 부장들에게 노고를 치하 하자 곽필승 부장은 서투른 조선말로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이 없었더라면 제가 어찌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겠스무이까.. 앞으로 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조선을 위하는 구국충정의 일념으로 쇼군(장군)과 함께 조선을 지키는데 이 목숨을 바칠 것이오무이다.”

그러자 곽재우 장군은 곽필승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래. 고맙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일본말로 뭐라 하나?”

“아리가도라 아오무이다.”

“아리가도.. 그래 너한테 아리가도다..”

곽재우 장군은 의령, 함안 등 경남서남쪽 지역에 의병을 증강 배치하여 육지에 상륙한 일본군과의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마두성(청도)을 공격했습니다. 마두성에는 한양을 향해 북진하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곽재우 장군 의병부대인 곽필승 부장이 이끄는 의병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으로 의병부대를 제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의 병력은 3천여 명이었고 대부분

기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곽재우 장군은 곽필승 부장에게 기마병 2천을 주어 일본군이 마두성(청도)으로 진격해 올 지역 산속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러한 의병부대의 동태를 알지 못하고 마두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다가 곽필승 휘하 의병부대의 기습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의병부대와 전투를 개시한지 하루만에 거의 전멸상태로 대패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도망친 자가 겨우 백여 명에 불과 했으니 완전히 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모리다 아리오(毛悧田有雄)’는 자신의 작전 실패를 크게 후회하고 통탄했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곽재우 장군은 그 이듬해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모병을 통해 4만의 병력으로 증강하고 의병부대를 사열함으로써 경남지역에서 일본군을 더욱 압박하였습니다. 이러한 곽재우 장군의 의병에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지만 곽재우 장군은 전면전에는 나서지 않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산속에 은밀히 매복해 있다가 기습공격 하여 유격전을 감행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공격은 일본군에게는 늘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산이 많은 조선의 지형에 익숙치 못한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유격전에는 속수무책으로 언제나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마두성(청도)은 경부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은 반드시 이 부근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의병으로서는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는 가정 좋은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하는 일본군은 항상 마두성(청도)을 공격 목표로 삼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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