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명작 중편소설 = 천강홍의장군 <11>
천강홍의장군
그후 2년이 지나자 곽재우 장군의 의병은 3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많은 의병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은 허약하고 조정 대신들은 붕당정치로 싸움만 하면서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운 데다가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오후 5시, 일본의 20만 병력은 모두 9개 부대로 나누어 조선 침략을 개시했습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을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후 6월 평양을 내주고 임금(선조)는 의주 땅으로 피난했습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었습니다.
이처럼 관군이 패하자 그 동안 양성해 온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놓고 곽재우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법이다. 이왕 나라를 잃고 왜놈들에 노예처럼 살바에야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의병들은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죽음을 각오하고 왜적과 싸울 것을 결의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의병을 상군(上軍)과 하군(下軍)으로 각각 1,500명씩 나누고 상군의 지휘는 곽재우 장군이, 하군의 지휘는 곽필승 부장군이 맡았습니다. 이렇게 의병을 상하군(上下軍)을 나눈 것은 하군이 의병(疑兵)으로 위장하여 왜군을 유인하면 매복한 상군이 기습공격을 한다는 전략때문이었다. 또한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이동하면 적에게 노출된 위험이 있어 분산하여 이동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 양상에 따라 상. 하군이 연합하여 동시에 공격한다는 전략도 갖고 있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말을 타고 싸울 때는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천강홍의장군이라고 하였다.
왜군의 병력 가운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진의 1만 8,700의 군사가 먼저 전함 700척에 나누어 타고 대마도 하구 대포를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조선 관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 도착한 일분군은 우암에서 3개 부대 부대로 진을 치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부터 산진성을 포위하고 잔인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 첫 전투에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장군이 전사하고, 수많은 백성과 가축까지 몰살당하고 성(城)은 반나절만에 함락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다시 병력을 나누어 서쪽의 다대포를 쳤다. 이 전투에서 첨사 윤홍신이 전사하고 다음 날에는 동래성이 무너지며 부사 송상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곽재우 장군은 곽필승 부장군과 의논하여 일본군이 육지에 올라오면 곧바로 공격할 준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일본군은 침략 이틀만에 벌써 경상해안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같이 몇몇 순국지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고 있을 때 지방 방위를 맡은 관찰사들과 경상도의 육. 해군 지휘관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조정에서는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가장 유능한 장수로 치고 있었으나 실제 그들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일에는 무능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이 이 일을 경상우병사로 보내 최전방을 지키게 하자는 유성룡의 말에 명장은 마땅히 한양에 있어야 한다면서 늙고 힘도 없는 조대곤(曺大坤)을 경상우병사에 기용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