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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일본 신지폐에 나오는 인물은 누구인가?

 

 

 

 

칼럼

 

 

    일본 신지폐에 나오는 인물은 누구인가?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일본 요미우리(讀賣)등 복수 매체에 따르면 2024년 7월 3일에 1만엔권 신지폐를 발행한다. 신지폐에 나오는 인물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1840-1931)이며 사이타마현(埼玉縣) 후카야시(深谷市) 출신이다. 후카야시는 사이타마현 북부에 있는 시이며, 도네강(利根川)을 사이에 두고 군마현과 인접하고 있다. 그의 출신지에서는 신지폐 발행을 기념하는 상품 판매 행사가 진행중이다.  기록을 보면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는 메이지시대와 다이쇼시대 초기의 대장성 관료를 지냈으며 사업가이다. 농민으로 태어났으나 후에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사무라이 신분인 막신이 되었으며, 메이지 정부에서는 대장소보사무취급(大蔵少輔事務取扱)이란 관직을 맡아, 대장성을 맡은 이노우에 가오루 밑에서 재정정책을 맡았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제일국립은행, 이화학연구소, 도쿄 증권거래소처럼 다양한 기업을 설립, 경영하였고, 니쇼가쿠샤(二松學舍) 제3대 사장(현 니쇼가쿠샤 대학), 상법강습소(商法講習所) (현 히토쓰바시 대학), 오쿠라상업학교(大倉商業学校) (현 도쿄경제대학)의 설립에 공헌하면서 ‘초기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日本資本主義の父)라고 부른다. 그는 논어를 통한 경영철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생전시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게 되지만, 대정봉환이 일어남에 따라, 1868년 5월에 신정부로부터 귀국을 명령받았고, 1868년 10월에 마르세유에서 귀국길에 올라, 같은 해 12월에 요코하마에 귀국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배운 ‘주식회사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였으며 대장성 관료로서 개혁안에 대한 기획 입안을 하거나, 도량형의 제정과 국립은행조례제도(国立銀行条例制定)에도 관여하였다.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 은행)장을 지내면서 실업계에 몸을 두었다.

 

또한 제일국립은행뿐만 아니라, 77국립은행(七十七国立銀行) 등 많은 지방은행의 설립을 지도하여 금융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은행들 외에, 도쿄가스(東京瓦斯), 도쿄해상화재보험(東京海上火災保険) (현재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東京海上日動火災保険), 오지제지(王子製紙), 전원도시(田園都市) (현재 도쿄 급행 전철), 지치부시멘트(秩父, 현 태평양시멘트), 제국호텔, 지치부철도, 게이한 전기철도,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삿포로맥주, 동양방적(東洋紡績) (현. 토요보(東洋紡), 대일본제당(大日本製糖), 메이지제당(明治製糖), 시부사와창고(澁澤倉庫) 등 매우 다종하고 다양한 기업을 설립하였는데, 그 숫자가 500개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업가로서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시부사와 재벌(渋沢財閥)’은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사익(私益)을 좇지 않고 공익(公益)을 도모한다’라는 생각을 평생에 걸쳐 실천하였으며, 후계자인 손자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에게도 이 점을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다른 재벌 설립자들이 모두 남작 작위에 그쳤던 데에 반해, 시부사와만이 홀로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던 것도, 그러한 공공에 대한 봉사를 일찍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실업교육(實業敎育)이 별로 성행하지 않았던 때라, 시부사와는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모리 아리노리와 함께 상법강습소(商法講習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와 오쿠라상업학교(大倉商業学校)의 설립에 협조한 외에, 니쇼학사(二松學舍)의 제3대 사장(舎長)에 취임하였다. ‘학교법인 고쿠시칸(学校法人国士舘)’을 설립, 경영에 관여하였고,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부탁받아 도시샤대학에 대한 기부금 총괄 업무에 관여하였다.

 

또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시대에 여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생각하여, 이토 히로부미, 가쓰 가이슈 등과 함께 여자교육장려회를 설립하였으며, 일본여자대학, 도쿄여학관(東京女学館)의 설립에 관여하였다. 1931년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수해 복구를 위해 ‘중화민국수해동정회(中華民国水災同情会)’ 회장을 맡아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민간외교 선구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이런 다양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부사와는 1926년과 1927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지명되기도 했다. 1916년에 ‘논어와 주판’을 저술하여 ‘도덕경제합일설’이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그는 1931년에 향년 92세로 사망하였다.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것이 올바르고 정당한 것에 대한 욕구로 작용하면 삶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지나치면 결국 인생을 망치게 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일본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떠난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 )의 일생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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