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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석가탄신일, 우리 모두 성불합시다

 

 

 

 

칼럼

 

 

         석가탄신일, 우리 모두 성불합시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올해는 佛記 2568년이며 5월 15일은 석가탄신일이다. 초파일(初八日)이라고도 한다. 부처는 BC 624년 4월 8일(음력) 해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와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經)과 논(論)에 부처가 태어난 날을 2월 8일 또는 4월 8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자월(子月:지금의 음력 11월)을 정월로 치던 때의 4월 8일은 곧 인월(寅月:지금의 정월)을 정월로 치는 2월 8일이라 원래는 음력 2월 8일이 맞지만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부처의 탄일로 기념하여 왔고, 한국에서도 음력 4월 초파일을 탄신일로 인정, 기념하며 1975년 1월 27일 대통령령으로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본래 ‘석가 탄신일’로 칭하였으나, 2018년 ‘부처님 오신 날’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불교를 연구해 보면 철학에 가깝다. 여기엔 생활의 지혜가 녹아 있다. 생활의 지혜라는 말은 흔히 듣지만 종교의 지혜라는 말은 생소한 어감을 준다. 세속생활에도 지혜스러움이 있어야 그 생활이 윤택하게 된다면 출세간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생활의 예지라는 어감에 더욱 친근감이 내포되어야 함에도 소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종교생활은 깊이 하지만 종교의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신앙은 하지만 신앙에서 비춰주는 그 빛살을 잘 수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종교란 지혜생활의 종합체다. 종교에 있어서 믿음을 발현시키게 하는 것은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추고 그늘진 곳이나 어두운 곳을 찾는 손길이 있어야 한다.

 

종교인이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가깝게 하고 그것에 친해져야 할 것은 계율의 생활화이다. 이것이 없다면 종교적 생명 가치나 예지가 싹틀 수 없다. 종교적 생활 즉 지엄한 계체(戒體)에 자기를 담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계책에서 품어 나오는 계향(戒香)이 있을 수 없다. 계체의 쓰임새 또는 계체의 향기가 온 몸에 배이고 그 배인 것이 주변에 훈습할 때 종교적 향기가 풍겨나게 되는 것이다. 원효스님도 계율의 존엄성을 지극히 강조하면서 계(戒)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계(戒)란 해와 달과 같다. 첫째, 해와 달은 그 스스로 참되게 물들지 아니하고 그 스스로 밝고 깨끗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깥 세계의 어두움을 파헤치고 어둠속에 가려 있던 일체의 존재를 잘 드러내 보인다. 계(戒)란 것도 이와 같이 해와 달과 같은 것이다. 그 자체는 잡되게 물들지 아니하고 그 스스로 밝고 깨끗하여 많은 번뇌와 죄업 등이 어두운 장애물을 파헤치고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해는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이 특성이요, 달은 서늘하고 시원하게 한다는 것이 그 성품이다. 만약 달만 있고 해가 없으면 모든 식물은 썩어 싹이 날 수 없을 것이다. 계(戒)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어서 만약 섭률의계와 섭선법계만 있고 섭중생계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자리행만 있고 이타행은 없는 것이 되는 까닭에 성문연각의 이승과 한 무리가 되어 무상보리의 중요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또 만약에 섭중생계가 있을지라도 섭률의계와 섭선법계가 없으면 오직 이타행만 있고 자리행이 없게 되는 까닭에 범부나 다름이 없게 되어 보시(布施)의 싹을 돋아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해와 달이 다 갖추어져 있어 능히 썩지 않고 싹이 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계(戒)도 역시 위의 세 가지 계(戒)를 갖추고 있으므로 능히 범부나 이승과 같을 수 없어 더 위 없는 보리(菩提)의 세가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해와 달은 땅을 떠나 공중에 떠다니는 듯하나 허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님과 같이 보살은 삼취정계를 지키되 어느 한 나라에만 치우침이 없고 어디에 집착함이 없으므로 법성의 허공에 나르지만 공견에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종교생활에 있어 계체(戒體)의 존엄성을 이해하고 이것을 신앙하지 않는 소님은 양심의 명제를 망각하고 무차치나 유차의 경우에 빠지고 만다. 진실이란 참으로 드러내기 힘든 행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의를 획섭하고 선법을 섭리하지 않으면 중생을 도섭할 수 없다. 오늘날 양식이나 믿음이 물량위주의 색계(色界), 욕계(欲界)에 휘말리기 쉬우나 삼취계의 덕목을 가슴 깊이 심고 이것이 생활의 향기로 풍겨 나오게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몸과 마음에 배이고 슬기와 손길이 무애하고 자재롭게 활용될 때 대지(大智)와 대비(大悲)는 중생을 구원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가 우리를 지지하고 합장하는 믿음의 마음에 희망을 주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육신에 환희를 안겨주는 보살의 불교로 발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불자들은 보리심(菩提心)을 일깨워 미물 곤충도 우리들의 자비심으로 모여들게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써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려는(上求菩提 下化衆生) 마음(菩提心)을 길러야만 성불할 수 있다. 다 함께 성불합시다.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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