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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 다라국의 후예들 제2부 제43회

 

 

권우상(權禹相) 장편 역사소설 제2부 제43회

 

 

다라국의 후예들

 

 

 

거타지왕(巨他之王)이 윤화(允花)를 왕비로 맞이한 그 다음해 봄. 거타지왕은 자신의 딸 미파공주(美巴公主)가 걸손국(乞飡國 : 구주)에 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걸손국에 두 명의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걸손국(구주)의 이소지왕(伊蘇志王)은 두 사신의 목을 베어 살해 했다. 미파공주를 다라국(多羅國)으로 귀환시켜 달라는 사신의 말을 거부하면서 이를 확실히 거타지왕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신이 살해 됐다는 소식을 들은 거타지왕은 매우 분노하였고 아들 거연무(巨淵武)에게 걸손국 정벌을 지시하였다. 거연무왕은 부왕의 지시에 따라 장수들을 불러 모아 걸손국(구주)을 정벌할 것을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돌입하였다. 이때 걸우찬의 아들 걸빈순(乞彬純)과 마천우의 아들 마공태(馬公太)는 병선(兵船)을 건조하는 감독관이 되어 조선(造船) 작업을 독촉하고 각처에서 뛰어난 뱃사공을 징집하였다.

하지만 신하들 중에는 걸손국(구주)을 정벌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하면서 재고(再考)해 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 이유는 걸손국(구주)은 섬나라인지라 수군(水軍)이 강하지만 반대로 다라군(多羅軍)은 바다에서 싸워본 경험이 없어 수군(水軍)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다라국 조정에서는 걸손국 정벌을 놓고 신하들 간에 의견이 서로 엇갈렸지만 거타지왕은 걸손국에 보낸 사신이 살해 당하자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걸손국 정벌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고차국(고성)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지난날 고차국이 가라국의 침공을 받을 때 다라국 거타지왕의 도움을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차국에서는 병력을 지원했다. 다라국(합천)과 고차국(고성)의 연합군은 총 3만명으로 편성했고 다라국 군사 및 고차국 군사 1만 6천, 다라국 수군 8천, 고차국 수군 6천으로 이뤄졌으며, 여기에 산반하국(散半下國 : 진주) 군사 5천이 가담하기로 하였으나 산반하국(散半下國 : 진주)이 출병 날짜를 지키지 못하자 산반하국 군사를 제외한 병력만으로 드디어 걸손국(구주)정벌 길에 올랐다.

다라군(多羅軍)을 총 지휘하는 장수 방우경(方雨經)은 조정에서 삼공(三公 : 승상,태부,대부)을 두루 거친 명장으로 몸집이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했다. 그는 우군을 통솔하고, 박량부(朴亮夫), 감호을(甘浩乙)은 부지휘관으로 삼았으며, 우군 지휘관에는 나유흔(羅有欣)을 임명하고 박보진(朴普眞)을 부지휘관으로 임명한 후 전체를 좌우군이라고 하였다. 우군이 먼저 공격하고 좌군은 전세를 보아 측면이나후면을 지원해 주는 전투대열이었다.

다라국과 고차국 연합군은 진해를 떠나 곧 임라국(대마도)에 도착하여 화살을 날리며 맹공을 퍼부어 섬을 장악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걸손국(구주)에 진격하자 걸손국 군사들이 영채를 세우고 전투 준비를 했다. 걸손국의 한 장수가 말을 탄 채 긴자루가 달린 도끼를 들고 달려 나왔다.

“남의 땅을 침범하다니 참으로 무모하구나! 나와 싸울 자는 니오너라.”

“누가 저 자와 싸울 것인가?”

우군을 지휘하는 방우경이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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