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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칼럼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믿음은 공적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나무가 제 뿌리를 믿는 것을 생각해 보자. 뿌리가 영양분과 물을 공급해 주니까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든든하게 버틸 수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제 뿌리를 믿지 않고 다른 나무의 뿌리를 믿는다면 안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도 따로 믿을 대상이 있어서 믿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의 뿌리, 즉 근본 자리를 믿어야 한다. 근본 성품 자리에서 보면 믿는 자도 믿을 대상도 믿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대로 주인공이고, 우주이며, 그대로가 공(空)인데 무엇을 믿고, 무슨 대상이 따로 있겠는가. 내 자신 그 모습 그대로가 부처이며, 주인공의 나툼(종교적인 기도의 힘, 또는 절대권능자의 출현등으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작용, 현상들)이니 말이다. 비유하면 나무가 뿌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나무 줄기나 가지나 잎이 뿌리와 따로 있는 둘이 아니라 그대로가 하나이니 믿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부처이며, 내가 곧 우주라는 것을 모르고, 따로 믿을 대상을 찾고 믿을 대상이 없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문제는 바로 이 모른다는 사실 즉 어리석음에 있다. 지금의 나는 본성의 나툼이며, 자신의 근본 성품은 우주만물과 둘이 이니라 한 마음으로 통하며, 서로 서로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면 따로 믿을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뿌리가 곧 우주의 뿌리의 부처 자리이니 이 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을 공덕의 어머니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불교는 첫째도 실천이요, 둘째도 실천이다. 누가 대신 일러줄 수 없고,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맛을 보고 맛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일거수 일투족에서 그런 믿음이 떠나지 않아야 진정한 믿음이 되는 것이고, 바로 믿음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이 달라지면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지고 자세가 달라지면 삶도 달라진다. 진주를 케려면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진주를 캐서 바닥을 박차고 힘차게 솟아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마음 공부를 하겠다면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깊숙이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한 생애를 살아가자면 슬픈 일도 많이 겪고, 가슴 아픈 고통도 이겨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법을 알고 그 맛을 볼 수만 있다면 슬픔과 고통을 참아 낼 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질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생각 돌리기에 따라서 삶은 고(苦)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 생각을 돌리지 못하니까 삶은 고(苦)의 굴레가 되는 것이다. 본래 고(苦)란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이니, 그 고(苦)가 나온 본래의 자리에 갔다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가령 누가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준 곳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수억겁 동안 만들어서 짊어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나온 그 자리에다 다시 갔다 놓아서 녹어야 한다. 용광로에 무쇠, 잡쇠등 온갖 쇳조각을 집어 넣으면 녹아서 재생이 되는 이치와 같다.

 

 

육조 스님에서 하신 말씀 중에 「자성이 본래로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신 게 있다. 자성은 본래 더럽다, 깨끗하다도 없고 늘거나 주는 일도 없이 그대로 여여하다. 여여한 가운데 만법이 들고 난다 하였다. 비유하면 자신의 근본 자리는 다만 힘을 배출해 줄 뿐 일체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마치 자동으로 돌아가는 발전소처럼 전력을 생산해서 보내줄 뿐 멀고 가깝다든가 크고 작다든다, 좁고 넓다든가 하는 구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자동으로 흐르는 전력을 크게 쓰려면 크게 쓰고, 작게 쓰려면 적게 쓰고, 그야말로 제 마음대로 얼마든지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굳이 말한다면 발전소는 체(體)요 전등은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발전소와 전등은 둘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기에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하면서도 「자성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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