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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연재소설 = 제7의 왕국 제3부 54회




권우상(權禹相) 연재소설 - 7의 왕국 제354

 

      第七王國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헌애왕후는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 왕순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개경의 숭교사로 출가시킨 후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차례 자객을 보내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대량원군 왕순은 신혈사의 노승(老僧)인 현보(顯保) 스님이 방안에 땅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책으로 왕순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왕순을 죽이지 못한 헌애왕후는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 우복야 김치양은 왕위를 노려 헌애왕후와 함께 저를 죽일려고 자객을 보내고 심지어는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면서 저를 죽이려 하니 속히 구명해 주시옵소서 -

이러한 내용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중간에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대령원군을 차기 어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던 유충정이 왕순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이 위기상황을 전 할 수 있었다.

 

 

편지를 받은 목종(穆宗)은 왕순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왕은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복야(벼슬)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 듣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 부사로 있던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주며 한시 바삐 신혈사로 가서 왕순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 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 할려고 생각했다.

 

 

그 날도 신혈사 주변에는 김치양이 보낸 자객이 대량원군 왕순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었다. 이를 미리 눈치 챈 신혈사 노승인 현보 스님은 대량원군 왕순을 자기 방 땅굴에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자객은 대량원군 왕순이 요사채에 있을 것이라 믿고 야음을 틈타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 갔으나 대량원군 왕순이 없자 당황한 나머지 돌아 갔다.

 

 

그후 여러 차례 헌애왕후의 자객은 신혈사에 찾아 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일려고 하였으나 어느 방에서 지내는지 몰라 번번히 실패했다. 신혈사 노승인 현보 스님이 늘 대량원군 왕순을 숨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대량원군 왕순을 죽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가운데 병으로 누운 목종(穆宗)은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

주지 않았다. 유행간과 유충정이 왕명이라고 하면서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으며 그들의 측근들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폐하를 알현코자 하니 어서 아뢰주시오

하고 신하가 말하면 유행간은

폐하께서 어떤 분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명이옵니다

하면서 왕과의 면담을 일절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목종(穆宗)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목종(穆宗)은 스스로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한시 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왕위를 물러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穆宗)은 은밀히 충주부사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왕순을 데려 오라고 명령했다.

또한 정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西京)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불러 들였다.

 

 

강조(康兆)가 왕명을 받고 군사 5천을 이끌고 서경(西京)을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을 내사주서 위종정과 안북도호장 서기 최항(崔恒)이 찾아 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康兆)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백성들은 왕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 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강조(康兆)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고 군사를 이끌고 다시 서경(西京) 본영으로 돌아 갔다.

 

 

이 때 헌애왕후는 강조(康兆)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강조(康兆)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강조(康兆)가 오는 길목에 3천의 군사를 배치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강조는 첩자(諜者)로 하여금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동태를 낱낱이 알아내고 있었다.

헌애왕후가 강조(康兆)를 체포하기 위해 군사를 배치해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아들이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

-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란을 평정하라. 오는 도중에 김치양의 군사가 배치돼 있을 것이니 반드시 물리치도록 하라 -

는 내용의 서찰(書札)을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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