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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연재

나무가 된 그녀

 
그녀는 늘 은빛 햇살 속, 푸르른 나무처럼 굳건하게 서 있다. 그녀는 나의 30년 지기 S이다. 아이들 등교 시킨 이른 아침에 S의 전화를 받았다.

달콤하고 잔잔한 수다로 오전을 마감했다. 20분 남짓 거리인데 달려가서 마주앉아 티타임을 가졌음 더 정겨웠을 텐데. 뜨끈해진 무선전화기를 충전기에 내려놓으며 아쉬움이 와르르 쏟아졌다.

S는 여장부 기질이 다분하다. 미성(美聲)의 애교스러운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모습이나 행동은 씩씩하기 그지없다. S에게도 전업주부로서의 슬럼프가 있었다. 자리를 잡아 가던 일을 접어야 했던 30대 초반, 둘째를 기르며 속속들이 부딪치던 그 시절 S의 목소리는 늘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듯 했다.

끝없는 가사노동, 두 살 터울 사내아이들과의 휴전이 없는 전쟁에 꼬깃꼬깃 접어서 가슴 속에 쟁여야 했던 S의 꿈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실로 애처로운 일상이었다. S의 집에 갈 때마다 받은 느낌이 그러했다. 현관문을 열면 눈에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광경에 몸서리쳐지곤 했으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내 작은 발 하나 디딜 틈 없이 늘어 논 장난감, 짓이겨진 크레파스, 끈적거리는 요구르트와 엉겨 붙은 과자덩어리……. 그 순간마다 큰 행사를 앞 둔 사람마냥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내 어깨를 눌렀다.

S는 밤낮없이 제 몸에 엉겨 붙어 칭얼대던 두 녀석을 간신히 떼어 놓으며,
“점심은 먹었어?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물어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릴 기세였음에도.
“내 걱정은 말고 애들 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불편한 정장 윗도리를 벗어 식탁의자에 걸쳐 놓고S의 손 사레를 거부하며 싱크볼 가득 담긴 그릇을 부시고 윙윙거리며 거실을 청소했다. 라면 물을 가스레인지 불꽃 위에 올려놓은 후 거대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계란 한 알 없이 김치통 하나만 달랑 품고 있는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염려스러움에 울화가 치밀었다.

“대체 뭘 먹고 있는 거야. 밥심이라도 있어야 애들을 돌보지.”
우린 식탁을 잡고 보채는 두 아이를 번갈아 다독거리며 라면이 퉁퉁 불어 오를 때까지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엉성해진 그녀의 머리숱에 가슴이 미어졌다. 스트레스가 탈모로 드러나는 S였다. 그날 S는 말했다.

“내가 가구 같아. 울 신랑마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언제나 같은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소중한 역할조차도 퇴색돼 버린 가구, 있는지 없는지 존재까지 잊혀져가는 가구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맞다. 나 역시 그랬다. 두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전까진 나도 그 가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우울해지기 일쑤였다.

베란다에 세탁물을 널러 갈 때마다 11층에서 휘익 뛰어내리고픈 유혹을 수 없이 견뎌내야 했다. 나 아닌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종가의 종부, 아내와 엄마라는 피할 수 없는 내자리가 날 그처럼 황폐화 시켰었다. 이미 가구가 된 내게 희망의 파랑새는 영영 날아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둥지를 벗어나 파랑새를 찾아 나설 용기는 더 더욱 없었다. 그런 현실이 암담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며 거짓말처럼 완치된 그 병을 S가 그즈음에 앓고 있었다.

S에게 새털 같은 도움이라도 줄 의무감이 밀려왔다. 침묵 끝에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엄마니까, 약한 여자가 아니라 강한 엄마니까……. 나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이미 견뎌낸 일이야. 너는 분명히 오늘을 이겨 낼거야. 스스로 몰아세우지마. 넌 가구가 아니라 봄이면 싹을 틔우는 나무야.”

“내가 나무라구? 해마다 그 예쁜 연녹색 새싹을 틔우는 나무?”
동그랗게 커진 S의 눈이 소녀시절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래, 넌 나무야. 지금은 갑갑한 온실에서 싹을 틔우지만 언젠가는 넓은 들판에 옮겨 심을 수 있는 생명력 강한 나무가 될거야.”

여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시간이지만 여장부 기질이 다분한 그녀에겐 몹시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두 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하고 어린이집 원장이 된 S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S는 마치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3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자리 잡은 어린이집 운영을 양도 했다. 이유인즉, 셋째를 임신해서라고. S는 염려하는 내게 새 생명에 대한 설렘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 세발 바기 늦둥이 엄마 S, 그녀의 유모차가 새댁들의 유모차보다 엉성해 보여 내 눈엔 안쓰럽기만 한데 S의 발걸음은 날아갈듯 경쾌해 보인다. 장난꾸러기 아들을 셋이나 기르면서도 별안간 찾아 가곤 하는 집은 정리가 잘 돼 반짝거리고, 베란다에 가득한 나무에 정성을 쏟는 여유를 부린다.

가끔 나와 셋째를 데리고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미용실도 가고, 쇼핑도 하곤 하는 S의 모습에선 예전의 그늘이 없다. 지난해 겨울엔 억척스럽게도 세 아이를 끼고 6개월간 미국 어학연수까지 다녀왔다.

요즘엔 두 아이 기를 땐 왜 그리 힘들어 했을까, 그 시절의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고. 누가 등 떠밀어 돈 벌어 오란 말 한 적도 없고 일 아니어도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왜 그리 일, 일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대. 그 때는 아이를 방목한 것 같아 위로 두 녀석에겐 늘 미안한 맘이 앞선단다.

맞아, 친정어머니 말씀대로 그때는 엄마이기보다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침이면 베란다에 가득한 나무에게 화사한 미소로 인사를 건넬 S의 모습을 그려 본다. 참 곱다. 내 친구 S는 정말 나무가 되어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서 가족에게 그늘도 되고 쉼표를 찍어 주기도 하는 나무, 추억도 되고 그리움도 되는 고향처럼 포근한 아름드리나무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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