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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방석영 칼럼] 나보다 남을 먼저?

“나 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라”는 말이 있다. 저 자신만 아는 에고 또는 아상(我相)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생각한다면, 이 말만큼 위선적이고 어불성설인 말도 없다.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가운데,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챙기고 배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짐짓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판단이 서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무조건 우산이나 양산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하며 애정을 쏟을 필요는 없듯이, 무조건 나보다 타인을 배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가 오면 우산을, 햇볕이 쨍쨍 내려 쬐면 양산을 쓰면 그 뿐, 어느 하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넌 센스 듯이, 나 보다 무조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짓도 무늬만 그럴듯한 지독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내 발등의 불이 급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보다 급하지도 않는 남의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은, 이웃사랑도, 자비의 보살행도 아니다. 정견이 배제된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이웃이 급하면 이웃을 먼저, 내가 급하면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 올곧은 행동으로, 나와 이웃 중 누가 더 급한 상황인가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귀하고 필요할 뿐이다. 지혜의 눈으로 정견(正見) 할 수 없다면, 내 손톱 밑에 가시가 타인의 목에 걸린 가시보다도 더 걱정되고, 내 자식의 콧물 흘림이 남 자식의 피 흘림보다도 더 가슴 아플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팔이 안으로 굽듯이 모든 것을 자신 위주로 생각하는 짓만 멈춰도 어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지혜에 따른 정견(正見)은 ‘나’ 위주의 욕심을 비워낸 지공무사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0점 조정된 저울만이 정확한 무게를 재듯, 0점 조정된 마음만이 실상을 왜곡함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마음을 0점 조정한다는 것은, 온갖 악지악각(惡知惡覺) 덩어리인 업식(業識)을 녹여내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증득하는 일이다. 또한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모든 주견을 텅 비워냄으로써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영혼의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처럼 하늘의 참 생명인 道(도)에 통하고 道(도)를 펼치는 것이 모든 종교와 수행의 궁극으로, 이름 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아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첫 단추가 된다. 무위자연의 삶을 기독교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 성령의 도구로 쓰이는 삶이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업을 벗어던지고 보살도를 실천하는 무애 자재한 삶이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삶, 지복으로 넘쳐나는 가운데 몸은 건강하고 마음은 갈등 없이 편안한 행복한 삶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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