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순수예술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순수예술(Fine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역사적 개념이다. 예술을 회화. 조각. 시. 음악. 무용 등으로 제도화시킨 현대적 체계는 르네상스 이후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18세기 중반에 가서야 형성되었다. 이렇게 볼 때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역사상 특별한 예술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순수예술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만드는 고유한 매체나 재료, 제작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매체의 공통적 특징은 정보를 기록하고 보급하며 복제하는 기술적 가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수준의 문화현상을 엄청난 다수의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문화에 엄청난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 내용은 저속한 매개물의 성격이 농후하다. 하지만 대중매체의 문화를 단순히 보수적이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증식시키는 수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한 면도 없지 않다.
이는 부르주아 매체가 전능하다는 인식과 역으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예술과 대중문화를 의미있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그 사례를 살펴보자. 우선 순수예술이 대중문화로 수용되는 경우를 팝아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순수예술에 끌어 들이되 그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소수 집단의 문화가 자체의 엘리트적인 가치를 포기하기 않은 채로 그 정반대의 것을 수용하는 예가 된다. 주관주의에 몰두하거나 전통적 장르로 도피해 들어감으로써 소재를 대중매체에 양도하려는 시도는 대중매체가 강행해 온 예술에의 도전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대중문화가 순수예술을 수용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주요 사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광고의 경우 언어는 수세기에 걸쳐 화가들이 개발해 온 회화적 표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소재로서 순수예술이 사용되는 빈도가 아주 높다. (2) 현대의 순수예술은 대중매체의 ‘연구개발분과’의 구실을 한다. (3) 수많은 대중매체에 의해 순수예술과 관련된 소재들이 소비된다. (4) TV. 방송극이나 기업들, 출판인들에 의해 후원되는 대규모 예술 패키지가 이루어진다. 대중매체가 순수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 활용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고유한 권리를 갖고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는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이미지화 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대중매체가 제공한 표현에 종속되지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가 실제 작업을 통해 예술가는 ‘어떻게 그 같은 표현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통찰을 얻는다.
따라서 그들은 관중에게 다가서고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리고 상호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가지 활동을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용되는 매체의 발행 부수. 판형의 크기, 가격, 전시방식, 공급수단 등이다. 물론 내용과 형식의 문제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더구나 예술가들은 지역 공동체와 연결된다. 사진, 판화, 포스트에 이르기까지 표현 매체에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공동체 구성원의 창조적 잠재력을 개발하며 시각적 문화적 환경을 개선한다. 또한 각자 개발적인 예술가들은 순수예술을 떠받드는 전통과 예술 화랑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여전히 이용한다. 내용은 대중들이 갈구하는 다양한 모티브를 중점 분석하여 관중의 구미에 맞도록 하는 혼합매체가 더 활발히 구사된다.
오늘날 직접. 간접으로 대중매체의 영향을 반영하지 않는 전위예술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현대예술의 목표, 특히 대중매체의 이미지에 참여하고 있는 예술의 목표는 대중매체와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념과 표현의 메카니즘을 총동원하여대중의 인기에 영향을 주는 예술행위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런 종류의 예술이 갖는 힘은 영구성 보다는 일시적인 감성적 대중매체의 힘에 흥행몰이하는 예술은 그것이 순수예술이라기 보다는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3류의 흥행물인 것이다. 여자가 알몸으로 요염한 자태로 몸을 흔드는 춤을 관객들이 더욱 환호하고 있는 한 순수예술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