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북한의 전법은 속이는 싸움이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기원전 643년, 중국대륙을 호령하는 제(薺)나라 환공이 죽자 환공을 흉내 내려는 제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움직인 사람은 송(宋)나라 양공(襄公)이었다. 양공은 원래 상(商)나라 후예로서 환공이 살아 있을 때부터 패자(覇者)가 되려는 야심에 찬 사람이었다. 환공이 죽기전 제나라 환공으로부터 임금 계승에 문제가 생기면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송나라 양공은 환공이 죽자 공자 다섯이 너도 나도 임금이 되겠다고 다투어 제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자기 나라에 와 있던 태자 소(召)를 호송해 귀국시켰다. 송나라 군사가 제나라 공자들을 무찔러 소(召)가 주인이 되자 훗날 효공(孝公)으로 불렀다. 그런 다음 양공은 모임을 열어 송(宋), 초(楚), 진(陣), 채(蔡), 허(許), 조(曺), 정(鄭)의 일곱 나라 제후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양공은 자신의 작위가 가장 높아 당연히 맹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나라 성왕(成王)이 자기가 왕임을 내세우며 맹주 자리 앉아 버렸다. 양공은 분노했다. 그러나 작은 나라들이 모두 초나라를 두려워 하여 누구도 양공의 편에 서지 않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양공을 감금하고 송나라를 공격했다. 맹주가 되기는 고사하고 인질이 되어 망신만 당한 양공은 그해 가을에야 풀려나 원수를 갚으려고 다짐했다. 양공은 우선 만만해 보이는 정나라를 공격했다, 정나라는 초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초나라 성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쳐들어 갔다. 송나라 군사는 무참이 패하고 양공도 다리를 다쳤다. 백성들이 모두 패전을 자초한 양공을 원망했지만 양공은 자부심이 강했다. “군자는 남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고 진을 치지 못한 적군을 공격하지 않는 법이다. 부상 당한 사람을 다시 공격해서는 아니 되고 머리에 흰털이 난 사람을 잡아서도 아니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어질지 못한 짖이니라! 아무튼 나는 인(仁)을 지켰노라!“
양공의 이런 처신은 뒷날 “미련한 돼지의 인의(蠢猪式的仁義 : 준저식적인의)”라는 풍자를 들었는데 그 내면을 들어다 보면 실은 양공이 고대의 전쟁 방식과 법칙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한 것이었다. 원래 상고 시대의 전쟁은 적군을 죽이거나 적국의 땅을 차지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단 어느 쪽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잘못을 빌면 손실을 배상 받는데서 그치곤 했다.
공격도 단숨에 적군을 무찌르는 법이 없이 몇 걸음 전진하고는 멈추어 서서 대형을 조절하곤 했다. 활잡이, 창잡이들이 맡은 일을 엄격히 나누었으므로 누가 용맹한 척 나가면 전군에 위험을 조장할 가능성이 많았다. 공격수단도 다양하지 못해 양쪽 군사들이 맞부딪쳐 한바탕 겨루어 승부가 나면 싸움도 끝났다. 그래서 적을 100리 쫓아가면 상장군이 잘못된다는 말도 생겨 당시의 전법에 의하면 후퇴하는 적군을 함부로 추격하지 말아야 했다. 끝까지 추격하다가는 반격을 당할 위험이 컸다.
그 시대에는 주로 마차에 의해 싸웠는데 서주시대까지는 마차 한 대의 정원이 30명이었다. 그중 갑옷을 입은 사람은 10명으로 3명은 마차에 타고 7명은 마차 아래에서 걸으면서 마차 위의 사람이 다치면 대신했다. 보졸은 15명에 심부름꾼이 5명이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마차 한 대의 군사는 50명으로 늘어났다가 그 후에 75명으로 고정되었는데 초나라만은 100명이었다. 말 네 필이 끄는 마차 한 대를 승(乘)이라 했는데 싸움이 마차 몇 승(乘)이 나왔다고 하면 병력의 수를 손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싸우는 형식을 보면 마차의 왼쪽에 선 군사는 거좌(車左)라 불리는 두령으로 활을 쏘아 먼 곳의 적을 공격하고 마부는 중간에서 마차를 몰려 오른쪽 군사는 거우(車右)라 하여 마차 위에 꽂은 과(戈), 모(矛) 따위의 무기를 다루어 가까이 온 적군을 물리쳤다.
만약 왕이 마차에 타면 가운데에 서고 마부가 왼쪽으로 옮겼다. 왕이나 장수는 북을 두드려 군사를 자휘하는 일을 맡았고 거우(車右)는 마차가 구덩이에 빠지거나 어디에 걸리면 빼내는 일도 해야 하므로 힘이 세야 했다. 이 밖에 거우(車右)는 또한 장수를 보호할 책임도 졌다. 이렇게 마차가 굴러가면 그 뒤로 보병들이 창칼을 들고 따르는데 처음에는 아군과 적군 마차들끼리 싸워서 승패가 갈려지다가 차츰 보병들이 많아지면서 어지러운 싸움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송나라 양공은 옛날 원칙만을 고집했으니 이길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싸움은 남을 속이는 것(兵者詭道也)’이라고 설파한 손자병법이 나왔다. 북한이 바로 이런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 즉 우리를 속이는 전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