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진실로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진(晉)나라는 한(韓), 위(魏), 조(趙)로 갈라져 삼진(三晉)이라 하는데 위(魏)나라가 아주 강성했다. 문후왕(文侯王)이 걸출했기 때문이다. 문후왕은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잘 썼다. 측근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책적인 의견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시행했다. 문후왕은 전자방(田子方)과 단간목(段干木) 같은 현자를 상빈으로 모시고 적황(翟璜)을 최고의 벼슬자리인 상경(上卿)으로 기용해서 국정쇄신에 힘을 기울였다. 적황은 문후왕을 위해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등용했다. 서문표(西門豹), 오기(吳起), 낙양(樂羊)은 그가 천거한 명장들이고 이극(李克)은 유명한 문사(文士)였다.
문후왕은 서문표로 하여금 업(業)이란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자 신하들은 상소를 올리고 부정 비리가 있다면서 서문표를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후왕은 그럴리 없다고 했지만 워낙 신하들의 주장이 완강하여 문후왕은 실제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업(業)으로 가보니 곳간에는 쌓아둔 곡식이 없고 금고에는 저축해 둔 돈이 없었으며 무기고는 텅 비어 있었다. 신하들의 주장이 옳아 문후왕은 크게 실망하여 서문표를 크게 질책했다.
그러나 서문표는 “신이 듣건데 왕도(王道)를 행하는 자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패도(覇道)를 행하는 군주는 무사(武士)를 부하게 하며 나라를 망치는 임금은 창고만 가득하게 한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패왕이 되고자 하시므로 신은 힘을 백성들에게 축적하여 두었습니다. 신이 성위로 올라가 북을 치면 무기와 갑옷과 양곡이 즉각 갖추어질 것입니다”
서문표가 성위에 올라가 북을 한번 치자 백성들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모여 들었고, 다시 두 번 북이 울리자 백성들은 양식을 짊어지고 나왔다. 그제야 문후왕은 서문표가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려 왔는지 알았다. 문후왕은 서문표에게 “그대의 치도(治道)를 알았으니 백성들을 돌려 보내라” 하자 서문표는 “백성들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백성들과 한 약속에서 신용을 지키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북을 친 것은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 것인데 불러 놓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저들은 이후 신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이번 한 번만은 속일 수 있겠지만 다시는 속일 수 없습니다.
먼젓 번에 연(淵)나라가 우리나라로 쳐들어와 우리의 성 여덟 개를 빼앗아 갔으니 이참에 연(淵)나라를 쳐서 빼앗긴 땅을 회복한 다음에 저들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서문표는 병사들은 거느리고 연(淵)나라로 쳐들어가 빼앗겼던 땅을 회복하고서야 돌아왔다. 서문표는 국고를 비게한 죄를 받아야 하지만 백성들과 약속을 지켰고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은 공로로 큰 상과 가장 높은 상경(上卿) 벼슬을 제수 받았다.
요즘 야당의 모습을 보면 노동자를 연상케 한다. 야당은 여당과 세월호법을 두 번이나 합의해 놓고 다시 하자면서 장외투쟁이 나선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세월호 참사는 관료들이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법을 만들자고 한다면 또 다른 해상 참사나 육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유가족들이 법을 만들자고 한다면 그때도 또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과연 온당한지 묻고 싶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무너트리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리 군중의 수가 많아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야당은 세월호 유가족만 보이고 국민은 보이지 않는지 민생은 팽개치고 마치 개가 고깃덩이를 물고 사생결단 늘어지듯 세월호만 물고 늘어지는 야당에 진실로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