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진화론, 그 믿음에서 싹튼 어둠의 그림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다아윈’이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생물학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친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사이언스 투데이’지 인터넷 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생물학자들이 진화과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어느 학설을 신봉하든지간에 한가지 종류의 생물이 다른 종류로 변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적어도 약간은 있어야 하는 것이 이치적이다. 그러나 화석 기록에서 발견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생물들 사이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아윈’의 진화론을 뒤집을 만한 획기적인 학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 생물학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온 적자생존에 관한 ‘다아윈’의 개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보면 또 다른 점이 나타난다. ‘다아윈’은 이것을 자연선택 또는 자연도태라고 했다. 말하자면 적합한 생물이 생존하도록 자연이 선택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적합한 것들이 자신들의 우위에 기여한 새로운 특정들을 획득함에 서서히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아윈’의 진화론 이후 지난 125년간의 증거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적자가 생존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 생물이 어떻게 도태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어느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보다 덜 적합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떻게 그 동물이 호랑이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모든 후손은 어떤 다른 동물이 아니라 호랑이인 것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조상을 원숭이(類人猿)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동물원이나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원숭이는 왜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원숭이로 존재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모든 돌연변이가 진화론을 뒷받침하는데 상당히 유익하다 하더라도 돌연변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돌연변이는 사람의 머리털을 색깔이나 결을 바꾸어 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머리털은 일년이 가도 머리털이고 십년을 가도 머리털이지 그것이 깃컬이나 꼬리털로 변하는(진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칼 세이컨’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유전자 위에 돌연히 일어난 변화를 돌연변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은 변이는 자손에게 계승되어 진화의 소재가 된다. 환경은 생존에 적절한 몇 개의 돌연변이 종(種)을 선택한다. 그 결과 그 생물의 형태가 서서히 변해가고 그것이 종(種)의 기원이 된다’ 이러한 ‘칼 세이컨’의 말에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돌연변이가 진화의 기초라면 돌연변이 중 유익한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과 범죄 그리고 폭력, 마약, 등은 진화론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다. 즉 진화론, 그 믿음에서 싹튼 어둠의 그림자이다. 만일 모든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창조론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 보자. 나라가 다르다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총질을 해서 죽이고, 도둑질 하고, 강도질 하고, 성폭력을 자행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겠는가? 혹여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탈을 쓴 이방인일 뿐이다.
창조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은 허망한 존재이다. 그러니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한 온갖 삿된 욕망을 위해 마시고 즐기며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하고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슨 짓을 해서라고 돈을 거머쥐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온갖 범죄가 득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 그 믿음에서 싹튼 어두운 그늘에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하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내재돼 있다. 당신이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름답게 핀 화분속의 꽃을 보면서 당신은 이 꽃이 정말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산야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아람드리 나무가 정말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몸안에 흐르는 피와 가슴속에서 뛰는 맥박도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