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당도하자 이방원은 임금에게 아뢰어 봉상박사 벼슬을 재수했다. 그러자 길재가 “신이 옛날에 저하와 함께 성균관에서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은 것이옵니다. 그러나 신은 신씨(辛氏)에 등과해 벼슬을 하다가 왕씨(王氏)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지내고자 했습니다. 지금 옛일을 잊지 않으시고 신을 부르셨으니 신이 올라와서 뵙고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옵니다. 벼슬을 한다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오니 거두어주시옵소서.” 하고 간청하자 이방원이 말했다. “그대의 뜻을 바꿀수 있는 분은 오로지 주상일 뿐 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네. 내가 그대를 벼슬에 천거한 것은 맞지만 그대에게 윤허를 내린 것은 주상이니 그대가 벼슬을 사냥한다면 주상에게 상소를 올려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 아닌가?” 이방원의 말에 따라 길재는 자기에게 내린 벼슬을 거두어 달라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전하! 신이 본래 한미한 사람으로 신씨 조정에 벼슬해 과거에 뽑혀 문하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데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 하옵니다. 바라옵건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신이 두 성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해 효도로 노모를 봉양하게 해 여생을 마치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자 임금이 말했다. “그대에게 벼슬을 윤허한 것은 짐이지만 이는 대신들의 찬성이 있었기에 윤허한 것이니 그대가 벼슬을 사양한다면 대신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을 것이 아닌가?” 임금은 이튿날 경연에 나아가서 대신에게 물었다. “길재가 절개를 지키고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예전에 이런 선비가 있었는지 짐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러자 권근이 말했다. “이런 선비는 마땅히 머물기를 처해 벼슬과 녹봉을 더해 줘야 하옵니다. 그러나 청해도 거절한다면 스스로 그 마음을 정하게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광무제는 한나라의 어진 임금이지만 엄광이 벼슬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선비가 진실로 벼슬에 뜻이 없다면 억지로 빼앗은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다른 대신들의 의견도 권근과 같아 임금은 길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윤허했다. 그러자 사관인 홍여강은 말했다. “길재가 능히 옛임금을 위해 절의를 지켜 공명을 뜬 구름같이 여기고 벼슬과 녹봉을 헌신짝같이 여겨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려 했으니 참으로 충절한 선비가 아니옵니까?” 하면서 길재의 뜻을 높이 평가했다. 길재(吉再)는 뜻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뜻을 지켜야 할 근본도리라고 믿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한 낱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 부귀영화에 자신의 몸을 더럽히면서 지조를 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도 갈재는 조정에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후학지도에 평생동안 열정을 쏟으며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벼슬을 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길재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진 교육에 몸을 받친 지조는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길재의 사망소식을 듣고 임금인 이방원이 문상을 가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져 목계강(충주 남한강)이 범람하여 도강이 어렵게 되자 갑자기 강이 갈려지면서 통로가 생겨 이방원이 문상을 무사히 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때와 상황에 따라서 회전의자처럼 쉽게 태도를 바꾸는 요즘 정치꾼들 - 이쪽 당에 갔다 저쪽 당에 갔다 철새처럼 기웃거리며 당을 쪼개기도 하고 당을 붙이기도 하면서 오르지 권력에만 집착하는 추태를 보면 씁쓰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백성들의 곤고한 삶이 걱정돼 밤중에도 일어나 자리를 서성거렸다는 정조 임금 - 오늘날 우리 정치인 중에 과연 정조와 같은 국가도자가 있었으며 길재와 같은 국회의원이 있었는지 한번쯤 되돌아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