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우수수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보면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또한 주위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먹고 사는 데에만 정신을 몰두한 나머지 죽음이라는 다른 한 면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실정이다. 매일같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고 우리의 손바닥과 손등과 같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간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겠지만 요즘은 종교를 믿는 목적이 당장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되고 어떤 기도를 하면 자기 자식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데만 마음이 쏠려 본래의 목적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져 있는 느낌도 없지가 않다. 인간의 목숨은 백년도 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류는 일심동체로 살아가야 하거늘 어찌하여 서로 다투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중국에 장자라는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다. 공자 맹자와 쌍벽을 이룰만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친구인 혜자가 문상을 갔다. 그런데 초상집에서 곡소리는 나지 않고 장고소리가 들려왔다. 장자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혜자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장자에게 “그대는 부인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길렀고 이미 몸이 늙었는데 마누라가 죽어서도 울지 않고 장고를 치면서 노래까지 부르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는가” 하자 장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네. 마누라가 죽었을 때 난들 왜 슬퍼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마누라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래 삶이 없었던 것이요,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운(氣運)이 없었던 것일세. 어떤 무엇이 흐릿하게 황홀한 가운데 섞이어 있다가 그것이 변해서 기운이 되고 그 기운이 변해서 형상이 생겼고, 형상이 변해서 삶이 생겼고, 그 삶이 이제 도 변해서 죽음으로 간 것이네. 마누라는 지금 하늘과 땅 사이의 큰 방안에서 고통도 없이 근심도 없이 편안히 누워 있는데 내가 시끄럽게 소리내어 울면 내 스스로 천명을 모르는 것처럼 생각되므로 나는 울기를 그만 둔 것이네.” 이 대화는 장자(책이름)의 지락편(至樂篇)에 나오는 얘기인데 장자의 투철한 생사관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중국 스님 가운데 승조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구라마습 삼장법사의 제자로 겨우 설흔 한 살에 폭군을 만나서 침수를 당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四大元無主 五蘊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이라는 임종계를 남겼다. 地, 水, 風으로 된 이 사대육신은 본래 주인이 없고 수(隨), 상(想) 행(行), 식(識)으로 된 이 몸도 본래 공(空)한 것이라 머리위에 흰 칼이 번쩍인다 해도 오히려 봄바람을 베이는 것 같다고 한 내용이다. 이런 단계가 되어야 계무생사(契無生死)라고 할 수 있거니와 여기에 앞서 첫 단계인 지무생사(知無生死)란 것은 본래 없다고 하는 생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육신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 원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수(隨), 상(想), 행(行), 식(識)이라고 하는 정신작용이 인연따라 모였다가 흐트러지는 것일뿐 본래 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죽음도 따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함이다. 우리가 간혹 병원에 입원을 해보면 삶과 죽음에 관해서 대충 세 부류의 환자군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어코 살아 보겠다고 하는 부류, 삶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이다. 차제에 죽어 버리겠다고 하는 부류, 소수이기는 하지만 삶에 지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삶이나 죽음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부류, 어떤 동기에서나 다소 달관에 가까운 경지에 가 있는 사람들이다. 환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든 요컨대 삶과 죽음은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각자 타고난 운명에 의해 죽음이 결정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갈등을 느껴야 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답답하다면 답답하고 우울하다면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한 인식을 현실적으로 갖고 또 바르게 받아 들일 때 우리의 삶은 훨씬 여유가 있을 수 있고 또 죽음 역시 슬픔에서 벗어나 훨씬 편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