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에는 색깔이 있나 없나?” 이 질문에 당황하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이렇게 대답해야 맞다. “있다(有)라고 보면 있고(有) 없다(無)라고 보면 없습니다(無).” “있으면 있고(有) 없으면 없는 것(無) 아닌가? 그런데 있다(有)고 보면 있고(有) 없다고(無) 보면 없다(無)는 것이 뭣인가?” 이렇게 스님이 반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이 궁핍해진다. 정답은 ‘전법으로 보면 있고 후법으로 보면 없다” 하는 것이 맞다. 전법(前法)은 물체가 변화하기 전의 상황을 전법(前法)이라 하고 변화한 후의 법을 후법(後法)이라고 한다. 복숭아로 말하면 색깔이 빨간 복숭아가 변해서 썩으면 누루죽죽하게 된다. 그러면 빨간색과 누루죽죽한 색은 색깔이 다르니 마땅히 다르다고 해야 한다. 색깔만 바뀌었지 뭔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부처님께서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복숭아는 전법으로 보면 있지만 후법으로 보면 없다. 썩어서 변했기 때문이다. 복숭아가 썩어 먹을 수 없다면 마땅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또한 사람도 살아 있을 때 있다고 하지 죽은 송장을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말하면 여름에 나뭇잎이 파란 것을 보면 나뭇잎이 있다고(有)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뭇잎이 가을이 되어 낙엽으로 누렇게 색깔이 변해 있으면 그 나뭇잎은 없는 것이다. 썩어서 변했는데 어찌 나뭇잎이 있다고(有)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잎은 떨어질 낙(洛)자 나무잎 엽(葉)자 낙엽이라고 한다. 가끔 큰 스님은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이 뭐꼬?.” 하는 것이 바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육조스님께서 어느날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 하늘을 떠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기둥으로 삼었지만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칠통과 같아서 언제나 일상생활 가운데 있으나 일상생활 중에 붙잡을 수 없으니 여러 대중은 말해 보아라 무엇이라 하겠는가?’ 하였으니 이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의심하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이 몸은 자동차와 같은데 자동차를 이끌고 다니는 운전자가 있듯이 이 몸을 이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고? 하기도 하며 이 몸은 죽은 송장과 같은데 이 몸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 주인공이 있기 때문이니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인고?’를 줄여서 ‘이 뭣고’ 하는 것이니 사물을 보고 자꾸만 이 뭣고 하고 의심하라 하였다. 학인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개(狗子)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씀하기를 ‘없다’ 하였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고? 의심하라 하였다. 하지만 이 화두에서는 열 가지 병통이 있다. 첫째는 유(有)와 무(無)의 상대적 견해를 내지 말라하였고, 둘째는 참으로 없다(眞無)는 무(無)로 헤아리지 말라 하였고, 셋째는 이치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라 하였고, 넷째는 식정(識情)으로 이렇고 저렇고 분별하지 말라 하였고, 다섯째는 눈을 꿈적거릴 줄 아는 바로 이것이라 하지 말라 하였고, 여섯째는 말재주만 부려서 아는 체 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한데서 공(空)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일곱째는 공안(公案)을 생각할 줄 알며 봉(棒)을 들 줄 아는 이놈이라 하지 말라하셨고, 여덟째는 문자 가운데 있는 말을 인증(引證)하거나 인용(引用)하지 말라하셨고, 아홉째는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지 말라 하셨는데 이러한 병에 걸리지 말고 오직 조주스님께서는 왜 무(無)라 했는가 하고 의심하라 하셨다. 필자가 불교에 입문하면서 수지 받은 법명은 연화정인(蓮花淨人)이었다. 연화(蓮花)는 연꽃이며 연꽃은 더러운 뻘밭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한다. 더러운 벌빹과 같은 세속에 물들지 말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불교는 여타 중교와 달리 깨닫는 종교다. 따라서 스스로 깨달은 경지에 오르면 그 마음을 보리심(菩堤心)이라고 한다. 세상의 인심이 어둡더라도 우리 모두 보리심으로 연꽃같은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