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9 (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권우상 칼럼 - 고대 국가의 첨단 무기

 

 

칼럼

 

 

 

                                     고대 국가의 첨단 무기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관도전쟁에서 조조는 발석거의 위력에 힘 입어 한동안 패하기만 하던 원소의 100만대군과의 전투에서 대성을 거두었다. 발석거(發石車)는 말 그대로 돌()을 던지는 기계다. 커다란 돌덩이를 쏘아붙이는 수레로 주로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무기다.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 돌덩이나 불덩이를 적진으로 날려 보내는 발석거는 북송(北宋 960 - 1127) 시대에 많이 쓰이던 무기로 그 이름을 포()라고 했다. 세월을 거슬러 무기의 뿌리를 살펴보면 춘추시대까지 올라간다. 그 시대에는 발석기(發石機)라 부르거나 한글판에는 없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석(), (), ()를 합한 복잡한 글자였다. 북송 때의 발석거 구조를 보면 튼튼하게 짠 커다란 나무틀에 통나무로 만든 축을 하나 가로 놓는다. 굵직한 그 축의 가운데에 세로로 긴 통나무로 궨다. 이것이 바로 지렛대다. 지렛대의 뒷부분에는 돌덩이를 담는 질긴 가죽판이 있고 일부분에서는 밧줄이 몇 십가닥, 심지어 100여 가닥 가까이 달려 있다.

 

 

포를 쏘기전에 미리 돌덩이를 가죽 판에 올려 놓고 쏠 때에는 한 사람이 목표를 측정하고 여러 사람이 지휘관이 발포 명령을 내리면 사람들이 일제히 밧줄을 잡아 당긴다. 지렛대가 공중으로 획 돌면 돌덩이가 날아가 적진에 떨어진다. 발석거는 2000년 동안 고대 국가에서 가장 무서운 첨단무기였다. 강한 쇠뇌는 창()을 쏠 수 있어서 병력과 말()에 대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졌지만 성벽과 보루 따위는 망가 뜨리지 못했는데 발석거로 날린 돌은 성벽을 뚫어 그 앞에서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조조가 관도 싸움에서 쏜 발석거는 어느 정도 무거운 돌을 던졌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송()나라의 발석거에 대해서는 중국측 기록이 많아 무게가 90근까지 가는 돌을 날릴 수 있었다고 한다. 환산해 보면 57kg 가까이 되는 돌이라 그 위력이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 돌에 맞는다면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남송(南宋) 함순(咸淳) 10(1274)에 몽골군이 송나라의 양양성(襄陽城)을 공격할 때 무게 150, 그러니까 95kg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돌을 던지는 발석거를 만들어 전투에 사용됐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맞히는 곳마다 무너졌다고 한다. 몽골군은 결코 기마병만으로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첨단 무기들을 사용해 수 많은 나라를 무차별 정복했다. 이 무기는 양양성 전투에서 처음 실전에 쓰였다 하여 양양포(襄陽砲)라고 부르고 또 포를 설계 제작한 사람이 이슬람교도인 이스마인(亦思馬因)이라 하여 이슬람교도를 회회(回回)라 부르던 그 시대에의 관습에 따라 회회포(回回砲)라고 불렀다.

 

 

송나라의 포와 마찬가지로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했으나 포탄을 날리는 방법이 달라서 무거운 돌을 힘 있게 날릴 수 있었다. 송나라의 인력 발석거는 수십 명이 줄을 잡아 당겨 돌을 날리므로 그 힘에 한계가 있고 또 사람들의 힘과 속도가 똑 같을 수 없어서 위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회회포는 큰 돌덩이나 무거운 철강석을 적진에 떨어뜨리게 했으니 그 시대에서는 가장 첨단 무기였던 것이다. 중력을 이용한 이 무기는 지렛대의 앞부분에는 사람들이 잡아 당길 밧줄이 아니라 거대한 돌이나 철강석을 갈고리로 걸어 떨어지지 않게 하다가 사격할 때 갈고기를 급히 때어내면 돌이나 철강석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지랫대의 앞부분에 놓인 돌포탄을 날려 보낸다. 양양포는 1368년에 건국된 명()나라 때에도 전투에 쓰였으나 그 후에 화포가 발명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나라는  대륙 백제와의 전쟁에서도 발석거를 사용하여 백제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지만 별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성() 밖앝 둘레 20여 리의 땅을 깊이 파서 물을 가두어 놓아 강을 만들어 적군이 쉽게 성()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해()자라고 한다. 이런 해()자가 설치된 성은 사거리가 멀어 발석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두 번째는 대륙 백제군은 위나라군과 싸울 때 수성(守城) 작전이 아니라 직접 나가 싸우는데 적과 싸우다가 패한 척 하면서 도주하여 협곡으로 적을 유인한 후 포위하여 적을 섬멸했다. 이런 백제의 전략으로 위()나라 탁발굉은 무려 6번이나 백제를 공격했지만 모두 대패했다. 이로 인하 위나라는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발석거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싸울 때에도 사용되었다.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은 발석거를 일본열도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에도 보급하여 소왕국들을 정벌하는데 사용했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