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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나라백제(奈良百濟) 계체천황 반란은 실패

 

 

 

칼럼

 

 

                  나라백제 계체천황 반란은 실패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백제는 무령왕이 죽자 5235, 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순타(淳陀)는 장남이자 태자이다. 5138월 왜지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서 죽고 차남 사아(斯我)는 나라백제에 머무르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백제가 나라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아(斯我)의 아들은 법사군(法師君)이다.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결단성이 있었다. 가야(伽倻)가 섭라지역을 백제에 빼앗기자 가야분국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백제에 대항했으나 대패하자 가야는 백제에 등을 돌리고 신라와 손을 잡았다.

 

 

 

또한 왜지의 나라백제가 섭라의 영유권이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자 가야는 나라백제와도 등을 돌렸다. 백제에게 섭라(涉羅)와 임나(任那 : 대마도) 4개현을 빼앗긴 가야는 신라와 더욱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자 백제 성왕은 가야를 칠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하는 상항에 있었기에 왜지의 나라백제(奈良百濟) 군사를 움직여 가야를 칠려고 하자 나라백제의 조정은 이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는데 근강모야(近江毛野) 세력은 백제를 도와 가야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축자국(筑紫國 : 지금의 北九州)은 가야 공격을 반대했다.

 

 

 

이 문제로 나라백제 조정은 내분이 일어나면서 극한 대립으로 번졌다. 축자국(筑紫國)의 왕 반정(磐井)은 원래 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장악한 암나(任那 : 대마도) 땅은 마땅히 가야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가야를 쳐야 한다는 백제 지지파 근강모야(近江毛野) 세력은 3만병력으로 가야 지지 세력인 반정에 대항했고, 반정은 자신을 옹호하던 주변 세력과 힘을 합쳐 근강모야의 군대에 대항했다. 이 전쟁에서 근강모야는 패배하여 퇴각하였고, 왜지의 나라백제 계체천황은 조정 대신들과 숙의한 후 물부대련(勿部大僆), 녹록화(廘鹿火) 장수 등에게 병력을 주어 다시 반정(磐井)을 치도록 하자 52811, 반정과 녹록화(鹿鹿火) 사이에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반정은 5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고,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지만 사상자가 속출하고 반정(磐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갈자(葛子)가 항복하고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나라백제의 내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가야를 공격해 하자 나라백제에 머물고 있던 가야의 중신들이 근강모야의 행위를 따지고 나오자 계체천황은 근강모야에게 밀사를 보내 가야 공격을 중단하고 귀환할 것을 명령했으나 근강모야는 귀환을 거부했다. 이는 근강모야가 신라가 없앤 남가라(南加羅), 녹기탄(鹿己呑)을 부흥하여 임나(對馬島)에 합친 후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근강모야의 군사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과 대치했지만 상황은 점점 근강모야에게 불리하게 몰아갔다.

 

 

만약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게 근강모야가 생포된다면 나라백제 계체천황(繼體天皇)의 밀명(가야를 치라는 음모)이 탄로할 것이고 그에 따른 백제와 신라의 비난이 만만치 않을터라 나라백제 계체천황은 불안한 나머지 목협자(木頰子)를 근강모야에게 보내 돌아올 것을 거듭 종용하자 근강모야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터라 구사모라성을 버리고 임나(대마도)로 피신했다. 이때 구주(九州)의 축자국왕(筑紫國王 : 磐井王)과 나라백제의 계체천황은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또 많은 병력이 임나(대마도)를 거쳐 한반도에 가려면 선박이 필요한데, 구주의 북부에서 교통편을 제공하지 않으면 애초에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야(伽倻)를 친다는 빌미로 근강모아에게 군사를 내준 것은 계체천황의 위장작전이고, 실제는 구주(九州)와 나라백제를 타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계체천황이 나라백제의 종속을 거부하고 반역의 군사행동을 한 것이다. 계체천황은 물부녹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에게 축자국의 반정왕(磐井王)을 토벌하도록 하면서, 장문(長門) 지역은 계체천황이 다스리고 축자국 서쪽은 대장군 물부녹록화대련(勿部簏鹿火大連)이 뺏아서 다스리라고 했다. 이는 계체천황이 영토를 나누어 주며 나라백제를 없애려고 한 계략이었으며 계체천황이 죽임을 당하자 그의 반란은 막을 내렸고 5312월에 죽었다. 계체천황이 죽은 후에 나라백제의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532, 금관가야왕 김구해는 왕비와 그의 세 아들 노종, 무덕과 함께 구사모라 성()을 포위하고 있던 신라군에 항복했다. 가야땅을 차지하기 위한 나라백제 계체천황의 행동은 신라가 가야 땅을 차지하도록 도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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