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2000년 전에도 있었던 병역기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2000년 전에도 병역 기피가 있었다. 후한시대의 병역제도를 보면 사지가 멀쩡한 남자라면 23세가 되면 나라의 부역(賦役)에 나갈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 2년 동안은 병역에 복무해야 한다. 처음 1년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군(郡)에서 근무하는데 정졸(正卒)이라 하고, 다음 1년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수도(首都)에 가서 황궁을 보호하는데 위사(衛士)가 되고 국경에 가서 근무하면 주졸(紂卒)이라고 불렀다. 2년간 군(郡)에서만 근무하면 정졸(正卒)이라고 부른다.
복무가 끝나면 예비역으로 넘어가 고향에서 1년에 한 달씩 군(郡)이나 현(縣)에 가서 일하는데 이런 부역은 경졸(更卒)이라고 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싸움이 벌어지면 전쟁에 나가야 하는데 56세가 되어야 더는 군인 노릇을 하지 않고 국가의 어떠한 부역에도 나가지 않았다. 군대에 가면 죽거나 다치기도 하는 등 위험이 따른다. 또 의무병역제도인 만큼 수도와 변경에 갔다오는 여비도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그 돈의 부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농경문화에서 젊은 노동력이 일터를 떠나면 가정에는 심한 인력 손실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병역 기피가 많았다.
당시 몸이 튼튼해도 군에 가지 않는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문학(文學)이라고 부르던 유학(儒學)을 배우는 선비들이었다. 후한 시대에 최염(崔琰)이라는 인물은 청소년 시절에 무예에 빠졌다가 23세가 되어 군대에 가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어 뒤늦게 유학에 파고들어 대학자 정현을 따라 다니며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 시대에 선비가 된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병역과 부역을 기피하려는 속셈으로 유학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선비보다 확실하게 병역을 기피하는 방법으로 23세가 되기 전에 벼슬 길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조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20세에 벼슬을 시작해 하루도 병졸 구실을 하지 않고 장수로 병졸들을 부리기만 했다.
공부할 실력이 없거나 관원이 될 행운도 없으면 돈을 내고 병역을 기피했다. 1년에 한 달씩 부역을 피하려면 동전 300전을 내야 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이를 경부(更賦)라고 했다. 후한시대에 중요한 세금원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부역에 나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다. 그러다 보니 돈 있는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만 군대에 가다보니 애국심 보다 목숨 보존에 연연하여 적군에게 투항하는 병졸이 수가 많아 전력에 큰 차질이 빚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병역을 기피하려면 동전 3000전 쯤 내야 했다고 한다. 이 금액은 관원들의 녹봉을 계산할 때 쌀 한 섬에 동전 80전 정도였으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호적을 숨겨 병역을 기피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이처럼 부역과 병역을 기피하려는 사람은 많고 전쟁에 나가 사람은 꼭 필요하다보니 조정에서는 병력 기피로 받아들인 돈으로 일꾼을 사고 병졸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병졸들의 사기와 질(質)에 문제가 많았다.
진(秦)나라에는 철저한 의무병역제도를 실시했다. 그래서 초(楚)나라를 칠 때 6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법가사상에서 엄격한 법률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병역을 기피하면 온 집안의 목이 날아갈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전쟁에 나가 공(功)을 세우면 후한 상(賞)을 주는 등 특별히 대우를 했다. 그러다 보니 진나라 사람들은 개인적인 싸움에서는 겁을 내지만 뭉쳐서 적을 공격하는 전투에는 용맹했다. 전국시대의 강국이었던 위(魏)나라는 의무병역제도 보다는 정예부대 제도를 채택해 우수한 군사를 뽑아썼다. 최정예 군사는 양주(凉州)의 기마병들이었고 중원 일대에서 가장 용맹한 군사는 단양병(丹楊兵)이라 하여 중부와 동남쪽을 차지한 양주(楊州) 단양(丹楊) 출신의 병졸들이었다.
조조는 동탁을 치다가 실패하자 양주에 가서 군사를 얻었고, 서주(西州)의 도겸도 유비가 서주로 오자 단양병 4000명을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후한(後漢)의 병역제도에 허점이 많아 군사력이 떨어졌다. 후한 말년에는 큰 군벌의 정규군 이외에 사적인 군대가 많았다. 창칼이 번득이는 세상에서 살아남자면 반드시 창칼을 잡아야 했으므로 정식 군대나 봉기군, 화적패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부자나 협객, 고관들이 모은 개인 군대에 들어갔다. 이런 사병(私兵)을 흔히 한(漢)나라 때 정식 군대의 편제 이름을 부곡(部曲)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