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말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살고 있는 한 도사는 천문, 지리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도 예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자, 저명한 학자는 도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 해 볼려고 작은 새 한 마리를 두 손에 움켜쥐고 물었다. '도사님의 뛰어난 능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손에 있는 새가 한 마리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 맞춰 보십시오.“ 도사는 말했다. ”만일 내가 살았다고 하면 당신은 손에 힘을 줘서 새를 죽일 것이고, 죽었다고 하면 손을 펴서 날려 보낼 게 아니겠오. 그러니 당신 손에 잡힌 새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는 당신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요.“ 도사는 논리학적 이분법을 알아 자칫 난처하게 될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남자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여 공원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한 무리의 백인들이 잔디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미국 사람들은 그 동안 내가 듣던 것처럼 정말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넉넉한 생활을 즐길 줄도 알아야 사는 맛이 날테지.‘ 조금 후 흑인 몇 명이 역시 잔디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칼럼 판단은 신중하게, 결단은 신속하게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것은 바로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그만 둬야 할까 그만두지 말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전연 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신속히 가야할 방향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랜시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고민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어떤 일을 선택하기까지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고민도 한다. 하지만 검토는 오래 하지만, 일단 결정이 나면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판단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지만, 결단은 신속하게 한다」는 것이 나의 처세술이다. 판단과 결단은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매우 크다. 그것은 바로 판단에는 정답이 있어도 결단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결단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결단을 할 때까지는 판단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한다. 「판단」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엇비슷해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여건을 고려하고, 이해득실을 심사숙고 해도
칼럼 구두쇠 양반과 목수 총각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 어느 마을에 돼지처럼 욕심이 많은 구두쇠 양반이 살고 있었다. 원래 공짜라면 양잿물도 많은 것으로 골라 먹으려 하고 감기조차 남들이 가져갈까봐 조심하는 위인인데다가 성질까지 어찌나 고약했던지 장사꾼도 그 집앞을 지나기조차 꺼려했다. 하루는 솜씨 좋기로 소문난 한 목수 총각이 읍에 장보러 가다가 양반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양반은 이 목수 총각을 보자 불러 세우며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보게 목수 총각! 마치 기다리던 참이네. 다음번 산에서 내려올 때 나막신 한 켤레를 만들어 주게, 나는 키는 작아도 발은 큰 편이니 좀 여유있게 만들게, 값은 후하게 주겠네.” 총각은 읍에서 돌아오자 산에 올라가 고운 참나무를 골라 나막신 한 켤레를 곱게 파서 동백기름을 발라 윤기나게 해 두었다가 며칠 후 양반에게 갔다 주었다. 나막신을 받아 신은 양반은 만든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값이 꽤 될 것 같아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물었다. “그래, 값은 얼마나 받겠나?” “거저 해 드렸으면 좋겠으나 이 일로 먹고 사는 처지이니 알아서 품값이나 주시지요.” “음,
2019 기해(己亥)년 가을을 막 보내고 난 아쉬움 때문인지 하늘은 더욱더 높고 청명하며, 꽃들은 더욱더 예쁘고 아름답기만 하다. 하늘이 높고 맑으며 밝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높고 맑으며 밝기 때문이다. 꽃들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높음과 맑음과 밝음이 없다면, 하늘은 결코 높고 맑고 밝을 수 없다. 우리 마음에 예쁨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 어떤 꽃도 예쁘고 아름다울 수 없다. 心不在焉(심부재언) 視而不見(시이불견) 聽而不聞(청이불문) 食而不知其味 (식이부지기미)라는 가르침이 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성현의 말씀이다.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나에게 마누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못해 밖으로 철철 흘러넘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일 뿐, 처갓집 말뚝이 특별나고 대단해서가 아니란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이 내재해 있느냐에 따라, 즉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온갖 기억 뭉치인 업식(業識)에 따라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만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 나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바로 가져야 하는 버릇입니다. 누구든지 소유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다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인간관계에서 지나친 소유욕(所有慾)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어릴 때부터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에 트라우마(trauma. 마음의 상처)로 자리해서 그런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꼭 사고 싶은데, ‘눈도 안 보이는 게 책은 뭐하러 사느냐’라는 계모의 핀잔이 큰 상처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 흔한 딱지 한 장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형편, 게다가 맹아원에서는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시간, 이런 것들이 제겐 고스란히 마음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유욕(所有慾)입니다. 잊어버려야 할 사람을 끝까지 마음속에 품고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품어야 할 인연들이 다 있을 겁니다. 시각장애인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에겐 특히 더 많
칼럼 덕(德)이 없으면 잔인한 통치자가 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일본 전국시대에 다이묘(大名 : 영주를 소유한 무사)로 상승한 대표적인 인물에 이세 신쿠로(伊勢新九郞)가 있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국도(國盜 : 나라를 훔친 도둑) 또는 효웅(梟雄 : 사납고 용맹스러운 영웅)이라고 불렀다. 나라를 훔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세 신쿠로는 자기 세력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라고 생각하고 농민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대할 방침을 세웠다. 그 방침은 「농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념이었다. 이세 신쿠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 지역 다이묘인 호리고에를 기습하여 살해했다. 그러자 이세 신쿠로에게는 지금이 영주보다 더 무서운 잔악성이 있다고 판단한 농민들은 멀리 도망을 쳤고, 병든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이세 신쿠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농민들은 무서운 존재야, 그리고 대응이 매우 빠른 존재야,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세 신쿠로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세 명의 병사가 교대로 환자 한 명을 간호하도록 해라, 스물 네시간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어선 안된다.“ 실제로 그렇게
칼럼 적개심 없는 국민, 나라 망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나는 태양계의 행성인 지구의 역사와 여기에 생존하는 인간의 역사가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는 황금밭이란 사실을 항상 느끼고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모든 이야기를 쓰는데 열중하고 있다. 지구는 무한대의 우주에 비하면 원자나 분자보다 작은 천체이지만 인간은 수 많은 슬픔과 고통스러운 역사를 끝없이 기록해 가며 서로가 자기 자신이 주인임을 강조한다. 한 사례를 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지도자였는데 페르시아 군의 침입이 예상될 때 그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함대를 만들었다. 이때가 기원전 460년, 마침내 페르시아 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와 아테네를 짓밟고 불바다로 만들었다.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을 연상케 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섬으로 피난하였으며 아테네 함대들이 아테네와 살라미스 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기다렸다. 그 함대의 지휘자는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였다. 그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다. 스파르타 군은 육상에서는 용감했으나 해상에서의 싸움은
칼럼 「적자생존」, 강자만 살아남는 원리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의 생존은 치열한 전쟁과 같다. 일찍이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는 모든 생물의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생존경쟁」 또는 「적자생존」이라고 표현했으며, 「양육강식」은 생태계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내가 아닌 모든 것들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이든 국가든 가혹한 경쟁에서 이겨내야만 생존할 수 있으니, 삶의 엄숙함과 심각함은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의 공통점은 분열과 통합의 연쇄반응적인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끓임없이 분열하여 계속 불어나게 마련인데, 분열과 개체군이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속에서 장기적인 종족 보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종족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했다.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논리는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며, 그 이론은 개인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사례를 보자. 어떤 사람이 사업능력이 탁월하여 여러 사업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 기업가는 후손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만간 여러 사업체를 자식들에게 1∼2개씩
공자님께서는 “無可無不可也(무가무불가야)”를 역설하신 바 있다. 할 만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일에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된다거나, 또는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거나 하는 고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물 흐르듯 상황 상황에 딱 들어맞는 무애 자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맹자는 사서집주를 통해 “孔子可以仕則仕(공자가이임즉임) 可以止則止(가이지즉지) 可以久則久(가이구즉구) 可以速則速(가이속즉속)” 즉, 공자께서는 벼슬을 할 만하면 벼슬을 하고, 그만둘만하면 그만두고, 오래 할 만하면 오래 하고, 빨리 떠날 만하면 빨리 떠나심으로써, ‘무가무불가야’의 삶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말했다. 벼슬할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만하면 그만둘 수 있는 삶은 주체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여유로운 행복한 삶이다. 이와 같은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벗어난 지공무사한 마음이다. 또한 목전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다. 누구나가 사리사욕을 벗어던지고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계 및 재계에서 마지못해 타인에 의해 쫓겨나는 것이 아니
칼럼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국민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진(秦)나라 시황제 이름은 영정이며,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인데 불륜으로 낳았다. 여불위는 전국 위나라 복양(濮陽)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남다른 장사 수완으로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에서 소금과 비단 등으로 대상인이 되었고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였다. 그는 식견이 높고 견문이 넓어 장사를 하면서도 늘 권력에 관심을 갖고 있어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여불위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인질 잡혀있던 진나라 공자 영이인(嬴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국가들은 인질을 교환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자국에서 중요하지 않은 왕자를, 힘이 약한 나라에서는 태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진나라에서는 영이인을 조나라의 인질로 보낸 것이다. 영이인은 소양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의 아들이었는데 태자가 아닌 안국군의 20여 명의 아들 중 한 사람인데다가 안국군에게 버림을 받은 하희 소생의 아들이라 왕위 계승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영이인은 성품이 매우 어질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서신을
칼럼 지도자는 지혜를 터득할 줄 알아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한 선비가 어느 날 아침 안방에 들어오자 부인이 밤새 정성들여 기운 버선을 내 놓았다. “아 부인, 참 잘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새 버선이 있었으면 했는데 고맙소.“ 선비는 새 버선을 집어들고 기쁜 표정으로 신었던 헌 버선을 벗고 새 버선을 신을려고 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버선이 작아서 아무리 잡아 당기며 애를 써도 발의 중간 쯤에 걸려 들어가지 않았다. 화가 난 선비는 부인 앞에 홱 던지면서 ”당신 재주는 참 이상한 데가 있어, 마땅히 작아야만 할 곳은 너무 크고 넓어서 헐렁헐렁 해서 영 재미가 없고 커야 할 버선은 이렇게 작게 기워 발이 들어가지 않으니 당신 것은 어째 매사가 이렇게 거꾸로만 되었단 말이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아니 당신 몸은 모두가 다 좋은 줄 아세요? 커야만 좋은 물건은 아무리 만져 키우려고 애를 써도 커지지 않고 크지 않아도 될 발만 쓸데 없이 커서 같은 치수라고 생각하고 기운 버선은 왜 들어가지 않아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웃었다. 에도(江戶) 성안에서 죄를 범한 일곱 명의 무사들에게
우리 요양원에 시청각장애인 거주인이 있습니다. 다른 시설에서 2011년 12월 우리 요양원으로 옮겨 왔는데, 간단한 신상 기록 밖에는 언제 농아가 되었으며 시각장애인이 되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우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름대로 붙임성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쉰이 넘었음에도 천진난만한 그의 행동은 어떤 때는 우리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 때가 참 많았습니다. 아쉬운 대로 수화라도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대화가 되긴 하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렇다고 일반 글자를 아는 것도 아니어서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어떻게든 대화를 해볼 요량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는 알려 할 것 같아 우선 나온 배를 만져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몸무게가 85kg나 되었기 때문에 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배를 만져 주면 내가 눈가를 금방 압니다. 그리고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알려주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식사 시간에 식당으로 안내하고 생활실의 화장실과 옷장 안내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로 된 십자가를 준비했습니다. 이걸 받아 들더니 가톨릭에서 하는 성호를 긋더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