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兩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13세기 때 일본의 도원(道元)선사가 중국에서 선(仙)을 배우고 귀국했을 때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고 묻자, 도원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이 옆으로 나고 코가 세로로 달려 있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空手(공수 : 빈손)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웃음 소리에 묻어 있는 인생의 공허함을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눈은 옆으로 코는 세로로(眼橫鼻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말 속에는 오직 한번 뿐인 이 인생의 엄숙함을 겪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숨어 있다. 매우 단순한 이 사실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까지 타국에서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수행해야 했다는 것을 도원선사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눈과 코와 귀와 입이 갖춰진 얼굴을 / 내가 갖고 있음을 깨달았노라」 마지막의 「깨달았노라」라는 구절이 헤아릴 수 없는 무게로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도원선사가 수행한 10년의 무게이다. 「버들은 푸
칼럼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말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살고 있는 한 도사는 천문, 지리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도 예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자, 저명한 학자는 도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 해 볼려고 작은 새 한 마리를 두 손에 움켜쥐고 물었다. '도사님의 뛰어난 능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손에 있는 새가 한 마리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 맞춰 보십시오.“ 도사는 말했다. ”만일 내가 살았다고 하면 당신은 손에 힘을 줘서 새를 죽일 것이고, 죽었다고 하면 손을 펴서 날려 보낼 게 아니겠오. 그러니 당신 손에 잡힌 새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는 당신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요.“ 도사는 논리학적 이분법을 알아 자칫 난처하게 될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남자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여 공원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한 무리의 백인들이 잔디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미국 사람들은 그 동안 내가 듣던 것처럼 정말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넉넉한 생활을 즐길 줄도 알아야 사는 맛이 날테지.‘ 조금 후 흑인 몇 명이 역시 잔디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칼럼 판단은 신중하게, 결단은 신속하게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것은 바로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그만 둬야 할까 그만두지 말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전연 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신속히 가야할 방향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랜시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고민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어떤 일을 선택하기까지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고민도 한다. 하지만 검토는 오래 하지만, 일단 결정이 나면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판단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지만, 결단은 신속하게 한다」는 것이 나의 처세술이다. 판단과 결단은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매우 크다. 그것은 바로 판단에는 정답이 있어도 결단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결단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결단을 할 때까지는 판단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한다. 「판단」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엇비슷해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여건을 고려하고, 이해득실을 심사숙고 해도
칼럼 구두쇠 양반과 목수 총각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 어느 마을에 돼지처럼 욕심이 많은 구두쇠 양반이 살고 있었다. 원래 공짜라면 양잿물도 많은 것으로 골라 먹으려 하고 감기조차 남들이 가져갈까봐 조심하는 위인인데다가 성질까지 어찌나 고약했던지 장사꾼도 그 집앞을 지나기조차 꺼려했다. 하루는 솜씨 좋기로 소문난 한 목수 총각이 읍에 장보러 가다가 양반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양반은 이 목수 총각을 보자 불러 세우며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보게 목수 총각! 마치 기다리던 참이네. 다음번 산에서 내려올 때 나막신 한 켤레를 만들어 주게, 나는 키는 작아도 발은 큰 편이니 좀 여유있게 만들게, 값은 후하게 주겠네.” 총각은 읍에서 돌아오자 산에 올라가 고운 참나무를 골라 나막신 한 켤레를 곱게 파서 동백기름을 발라 윤기나게 해 두었다가 며칠 후 양반에게 갔다 주었다. 나막신을 받아 신은 양반은 만든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값이 꽤 될 것 같아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물었다. “그래, 값은 얼마나 받겠나?” “거저 해 드렸으면 좋겠으나 이 일로 먹고 사는 처지이니 알아서 품값이나 주시지요.” “음,
칼럼 덕(德)이 없으면 잔인한 통치자가 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일본 전국시대에 다이묘(大名 : 영주를 소유한 무사)로 상승한 대표적인 인물에 이세 신쿠로(伊勢新九郞)가 있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국도(國盜 : 나라를 훔친 도둑) 또는 효웅(梟雄 : 사납고 용맹스러운 영웅)이라고 불렀다. 나라를 훔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세 신쿠로는 자기 세력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라고 생각하고 농민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대할 방침을 세웠다. 그 방침은 「농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념이었다. 이세 신쿠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 지역 다이묘인 호리고에를 기습하여 살해했다. 그러자 이세 신쿠로에게는 지금이 영주보다 더 무서운 잔악성이 있다고 판단한 농민들은 멀리 도망을 쳤고, 병든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이세 신쿠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농민들은 무서운 존재야, 그리고 대응이 매우 빠른 존재야,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세 신쿠로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세 명의 병사가 교대로 환자 한 명을 간호하도록 해라, 스물 네시간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어선 안된다.“ 실제로 그렇게
칼럼 적개심 없는 국민, 나라 망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나는 태양계의 행성인 지구의 역사와 여기에 생존하는 인간의 역사가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는 황금밭이란 사실을 항상 느끼고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모든 이야기를 쓰는데 열중하고 있다. 지구는 무한대의 우주에 비하면 원자나 분자보다 작은 천체이지만 인간은 수 많은 슬픔과 고통스러운 역사를 끝없이 기록해 가며 서로가 자기 자신이 주인임을 강조한다. 한 사례를 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지도자였는데 페르시아 군의 침입이 예상될 때 그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함대를 만들었다. 이때가 기원전 460년, 마침내 페르시아 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와 아테네를 짓밟고 불바다로 만들었다.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을 연상케 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섬으로 피난하였으며 아테네 함대들이 아테네와 살라미스 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기다렸다. 그 함대의 지휘자는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였다. 그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다. 스파르타 군은 육상에서는 용감했으나 해상에서의 싸움은
칼럼 「적자생존」, 강자만 살아남는 원리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의 생존은 치열한 전쟁과 같다. 일찍이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는 모든 생물의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생존경쟁」 또는 「적자생존」이라고 표현했으며, 「양육강식」은 생태계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내가 아닌 모든 것들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이든 국가든 가혹한 경쟁에서 이겨내야만 생존할 수 있으니, 삶의 엄숙함과 심각함은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의 공통점은 분열과 통합의 연쇄반응적인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끓임없이 분열하여 계속 불어나게 마련인데, 분열과 개체군이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속에서 장기적인 종족 보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종족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했다.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논리는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며, 그 이론은 개인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사례를 보자. 어떤 사람이 사업능력이 탁월하여 여러 사업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 기업가는 후손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만간 여러 사업체를 자식들에게 1∼2개씩
칼럼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국민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진(秦)나라 시황제 이름은 영정이며,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인데 불륜으로 낳았다. 여불위는 전국 위나라 복양(濮陽)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남다른 장사 수완으로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에서 소금과 비단 등으로 대상인이 되었고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였다. 그는 식견이 높고 견문이 넓어 장사를 하면서도 늘 권력에 관심을 갖고 있어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여불위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인질 잡혀있던 진나라 공자 영이인(嬴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국가들은 인질을 교환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자국에서 중요하지 않은 왕자를, 힘이 약한 나라에서는 태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진나라에서는 영이인을 조나라의 인질로 보낸 것이다. 영이인은 소양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의 아들이었는데 태자가 아닌 안국군의 20여 명의 아들 중 한 사람인데다가 안국군에게 버림을 받은 하희 소생의 아들이라 왕위 계승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영이인은 성품이 매우 어질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서신을
칼럼 지도자는 지혜를 터득할 줄 알아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한 선비가 어느 날 아침 안방에 들어오자 부인이 밤새 정성들여 기운 버선을 내 놓았다. “아 부인, 참 잘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새 버선이 있었으면 했는데 고맙소.“ 선비는 새 버선을 집어들고 기쁜 표정으로 신었던 헌 버선을 벗고 새 버선을 신을려고 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버선이 작아서 아무리 잡아 당기며 애를 써도 발의 중간 쯤에 걸려 들어가지 않았다. 화가 난 선비는 부인 앞에 홱 던지면서 ”당신 재주는 참 이상한 데가 있어, 마땅히 작아야만 할 곳은 너무 크고 넓어서 헐렁헐렁 해서 영 재미가 없고 커야 할 버선은 이렇게 작게 기워 발이 들어가지 않으니 당신 것은 어째 매사가 이렇게 거꾸로만 되었단 말이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아니 당신 몸은 모두가 다 좋은 줄 아세요? 커야만 좋은 물건은 아무리 만져 키우려고 애를 써도 커지지 않고 크지 않아도 될 발만 쓸데 없이 커서 같은 치수라고 생각하고 기운 버선은 왜 들어가지 않아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웃었다. 에도(江戶) 성안에서 죄를 범한 일곱 명의 무사들에게
칼럼 법적 죄책과 신학적 죄책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우리 개인과 관련된 현실적인 죄책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유형은 「법적 죄책(legal guilt)」 혹은 「시민적 죄책(civil guilt)」이다. 만약 우리가 빨간 신호등이나 정지 표시를 무시하고 달리거나 조세 포탈이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속도를 위반 할 때 민법 혹은 형법을 어긴 죄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 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책임이 있다. 만약 그런 죄로 인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벌금을 지불하거나 감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규정 속도를 위반하여 달리던 차들이 저 앞에 경찰차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옳아서가 아니라 붙잡히거나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법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무법성은 자연적인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성향이다. 두 번째의 유형은 인격에 대한 침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분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알 것은 이것이니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칼럼 평민이 황제 자리에 오른 여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리고 있었다. 지방관리들도 부패하기 짝이 없어 백성들만 곤궁에 빠져 있었다.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공사로 인하여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었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했을 때 마침 수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금(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건국에 공이 큰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 정부군과 싸울 때 목재상으로 많은 돈을 번 무사확(武士彠)은 이세민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세민이 왕이 되자 무사확은 유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무사학은 아들이 없어 두 번째 여인과 결혼 했지만 딸만 셋을 낳았다. 셋째 딸 조(粗)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얼굴도 예뻤다. 무조(武粗)가 13살 때 이적 장군의 추천으로 궁녀로 입궐하게 되었다.
칼럼 적(敵)을 경영하는 지혜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다도칸(太田道灌)은 에도 성(江戶城)을 축성한 인물이다. 그는 늘 전쟁에 신경을 쓰야했다. 도칸은 언젠가 대적하고 있는 도시마(豊島) 가문의 작은 성인 고즈쿠에(小机)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고즈쿠 성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도칸은 수백 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출전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도시마가 서둘러 고즈쿠에 성으로 지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성안의 병력 수는 도칸의 다섯 배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 정보가 들어오자 중신들의 얼굴이 어두어졌다. “우리는 소수이고 저쪽은 대군입니다.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일단 물러났다가 병력을 증강시켜 다시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중신들은 그렇게 제안했지만 도칸은 그대로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 물러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약화된다. 병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한다 해도 일단 마음속에 자리잡은 공포심은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대로 공격하기로 한다. 내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즐 것이니 병사들에게 부르게 하라.” 도칸의 말을 들은 중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