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아 있기에 깨어남은 즐거움이다
권우상
사주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밤이 가고 새벽이 오면 사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만일 깨어남이 없다면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죽음이라는 적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적절한 조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고린도 첫째 15:26) 하지만 거짓말이나 미신의 영향을 받아 죽음에 대해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가지면 “평생토록 종살이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히브리서 2:15) 죽음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은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진리를 알면 그러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요한복음 8:32) 우리는 살아 있기에 깨어난다. 깨어남은 즐거움이다. 이 깨어남이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순간이 인생이다. 사람은 잠시라도 수면의 긴 굴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영영 갇혀 있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밤이 되면 자고 새벽이 되어 깨어남을 향수하게 되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벽이 되어 깨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이 있다. 입놀림이다. 말을 하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는 깊은 흐름의 연속이지만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깨어난 아침에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맨 먼저 했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잠꼬대의 연속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확실하게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새벽에 깨어나면서 자기 발신의 목소리를 깨우쳐 아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불도의 구도자는 그 첫 음성이 옴(唵 : om)이 되게 하였다. 옴(唵)은 완성이요, 옴(唵)은 깨침이기에 옴(唵)을 첫 발음으로 불렀던 것이다. 정말 우리들이 깨어나서 깨침을 희원(希願)하고 완성을 발원한다면 하루 하루 그 생활이 즐겁고 밝아질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견탁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견탁을 한자로 쓰면 볼 견(見)자, 탁할 탁(濁)자를 쓴다. 부처님께서 세상이 오래가면 말법시대가 온다고 하셨다. 그 말법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 오탁(五濁)속에 견탁(見濁)이 있는 것이지만 견(見)이란 견해(見解)이기도 하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사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견해의 차이가 있으면 함께 어울릴 수가 없다. 그런데 견해의 차이가 있는데도 함께 어울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민주당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친명(親明)이 있고 반명(反明)가 있다. 그러다 보니 뭉쳐야 할 민주당이 서로 불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민의 힘도 마찬가지다. 한동훈 당 대표를 두고 비한(非韓), 친한(親韓)이 서로 격돌하고 있다. 동일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면 한데 어울려 일을 할 수 있고 인생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정당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가 다른 계모 밑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꼴이다. 이렇게 싸울 것 같으며 차라리 견해가 동일한 사람끼리 새로운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이 맞다.
탁(濁)이란 맑지 못한 흐림이다. 물들어 버린 상태, 오염된 현상을 뜻한다. 즉 올바른 법을 착각하는 고집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의 고집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 독선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하는데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쇠가 녹 쓰는 것도 쇠를 버리면 녹이 일어나지 않듯이 잘못되는 견해도 모두가 마음을 떠나면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잘못되는 견해를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아집을 경계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불이(不二)사상을 내걸고 있다. 양면성의 세계에서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도록 한 것이다. 전환의 세계 -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환 사상이 필요하다. 다른 것은 다 바뀌는데 나의 것만은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낙후되어 나락에 빠지게 된다. 현실을 환언하여 이상으로 삼는 것은 대단한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악(惡)한 것과 선(善)한 것은 항상 공존하고 있다. 악한 힘이 우세하니 선한 힘은 존재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것은 견탁인 것이다. 악한 것도 선한 것으로 변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선하게 살려면 견(見)의 사유를 정견으로 인발시켜야 한다. 세상을 배금사상, 황금만능이 지배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색견(色見)에 걸린 것이고 공견(空見)의 철학을 배척하는 견탁인 것이다. 요즘 수도자들이 군중과 함께 시위를 하거나 자기 목소리를 관철할려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견해를 밝히기 전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객관적 기준에서 판단해 봐야 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다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보다 동물의 생명에 더 비싼 값을 매기겠다는 견해는 필자로서는 수용할 수 없다. 믿음은 불신의 벽을 붕괴시키는 핵심이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네가 나를 믿지 못하면서 대립의 칼날만 세운다면 결국 말법시대가 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