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4부 스물 세 번째회 (23)
천天. 지地. 인人. 명 命
그러나 밤이 꽤 깊어서는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팽만수는 주인 어른의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하루 종일 마당에서 서성대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주인 어른의 부르는 소리에 팽만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인 어른은 마당에 세워 놓은 당나귀를 가리키며 이 당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마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고, 당나귀에는 금은(金銀) 보화(寶貨)가 가득 실려 있었다. 팽만수는 금은 보화를 보자 지게 위에 얹힌 바께쓰를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팽만수는 주인 어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당나귀에 올라 앉았다. 당나귀가 마당을 나서자
“ 꽝... ”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모두 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팽만수는 그것이 마당에 세워 둔 자기 지게가 넘어지는 소리임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어 잠이 깨었다. 금은 보화가 실린 당나귀를 타고 마당을 나선 것은 꿈이었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팽만수(彭萬洙)가 나가 보려고 윗저고리를 입으려는 순간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 불이야 ... 불이야... ”
여자들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새벽 하늘을 뒤덮을 듯이 들려 왔다. 방안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황급히 뛰어 나왔다. 그러나 벌써 거센 불길은 당장 집을 삼킬 듯이 집을 뒤덮었고 다시 신방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 불이야 ! 불이야 ! ”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마당으로 쏟아져 나와 옹기, 동이, 바가지 할 것 없이 하나씩 들고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불길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조금도 수그러들지 앉았고 더욱 거세게 하늘로 치솟았다. 보다 못한 팽만수는 자기의 지게에서 바께쓰 하나씩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말했다.
“ 이 바께쓰로 물을 날라 불을 꺼시오 !‘
바께쓰를 받은 사람들은 물을 퍼다가 끼얹었다. 그러자 바께쓰의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토록 거세던 불길이 주춤주춤 서서히 가라 앉아 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살인이다 ! 사람이 죽었다 ! ”
“ 신랑 신부가 칼에 맞아 죽었다 ! ”
불을 끄던 모든 사람들은 언거푸 일어나는 불길한 사태에 잿빛이 된 얼굴로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팽만수는 재빨리 신랑 신부가 있는 신방으로 달려갔다.
“ 아 ! ”
팽만수의 눈에 보인 것은 너무나 비참했다. 신랑 신부가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진 방안에는 피가 흥건히 흘러 내리고 있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참흑한 두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맹만수는 너무 끔직해서 눈을 감았다. 주인 내외와 여러 친척들은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고 뜻하지 않은 참변에 온 집안은 아수라장으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얼마 후 관가에서 포졸들이 나와서 신랑 신부를 세밀하게 조사하고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주인 내외는 물론 여러 손님들이며 친척들과 하인까지 심문했으나 범인이 누구인지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이번 혼인에 원한을 품은 자기 딸과 사위를 한 칼에 죽이고 불에 타서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는 의견에 일치했을 뿐이었다.
“ 그렇지만 혹시 ? ”
팽만수의 뇌리에는 뭔가 해결 할 수 있는 빛이 한가닥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주인 딸이 자기가 준 바께쓰를 움켜쥐고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칼을 맞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무의식중에 바께쓰를 움켜 잡을 수도 있겠지만 이불 베개 등 다른 물건들이 있는데도 왜 하필 바께쓰를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어제 주인 딸이 처음으로 바께쓰를 받았을 때 몹시 놀라는 얼굴빛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두 가지 의문에 무게를 두고 팽만수는 여러가지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사건이 일어난지 사흘이 지나도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동네 저 동네의 젊은 사람들이 관가에 붙들려 가서 문초만 받고 돌아왔을 뿐 범인에 관한 단서는 찾아내지 못하고 사건은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자 팽만수의 복잡한 머리는 점점 어렴풋이 한 줄기 희망을 향해 찾아들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게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희미한 안개같은 실마리가 눈에 보이듯 머리속에 예감으로 감겨 들어 왔다.
“ 범인은 양가가 아니라 박가일거야 ! 그리고 범인의 이름이 양바가지가 아니면 바께쓰와 비슷한 이름이 틀림 없을거야.. 그렇지 않으면 주인 딸이 바께쓰라는 이름을 듣고 놀랄리가 없고 또 죽을 때 하필이면 바께쓰를 움켜 잡을리가 없어 ”
여기까지 생각한 팽만수는 지게에 바께쓰를 얹어 지고 주인댁을 나섰다. 팽만수는 이제 장사 보다는 범인을 찾아 내는데 더욱 관심이 많았다. 어디선지 곧 범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에 팽만수는 기분이 들떠 있었다. 억울하게 딸을 잃은 주인 내외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