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3부 열 일곱 번째회 (17)
천天. 지地. 인人. 명 命
또한 자신은 이미 처자를 죽이고 온 몸이라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비장한 말과 군사들 역시 사소한 개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소리쳤던 것이다. 장수 계백의 확신에 찬 말을 들을 부하들은 사기가 높았고 그것은 일당 백의 전투력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계백의 결사대는 구름처럼 몰려오는 신라군을 맞아 칼과 창을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백제군의 전술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 방어선을 신라군이 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수비전을 펼쳤다.
신라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이 말을 타고 네 번에 걸쳐 백제군을 공격했지만 사기가 충천한 백제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 내고 물러 섰다. 신라군의 1차 공격이 실패한 것이었다. 신라군은 대열을 정비하여 다시 2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백제의 방어선을 뚫지는 못했다. 그러자 신라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신라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은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인 사기 진작책을 구사했다.
김흠춘은 아들 반굴을 적진에 뛰어 들어 죽게 하고 김품일 또한 아들 관창을 죽음의 장으로 내몰았다. 계백은 어린 소년이 말을 타고 공격해 오자 백제군 한 명이 나가 상대하여 싸워보니 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은 3합을 겨우 버티다가 4합이 시작되면서 백제군의 칼 끝이 소년의 목을 겨누었다. 나이가 어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생포하여 계백 장군에게 끌고 가자 소년은 계백 앞에 엎드렸다. 계백은 생포한 소년에게 말했다.
“ 나이가 몇 살이냐 ? ”
“ 열 여섯입니다 ”
“ 너희 신라에서는 너 같이 어린 소년도 전장터에 보내느냐 ? ”
“ 보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제 스스로 나온 것입니다 ”
“ 그래 참으로 기특하구나 이름이 뭐냐 ? ”
“ 관창이라 합니다 ”
“ 관창이라.... ”
“ 너의 아버지 이름은 뭐냐 ? ”
“ 김품일 장수입니다 ”
“ 김품일 장수라... 그럼 이 전쟁터에 나와 있겠구나 ? ”
“ 그렀습니다 ”
“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쟁터에 나오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 ...............”
“ 비록 적이긴 하지만 어려서 죽일 수가 없구나 ! 살려 줄터이니 돌아 가거라 ! 하지만 만일 또 다시 온다면 그 때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 돌아 가거라 ! ”
관창은 살아서 말을 타고 산라군의 진지로 되돌아 왔다. 그러자 아버지인 김품일은 관창에게 소리쳤다.
“ 적과 싸우다가 생포되었으면 스스로 자결할 것이지 치욕스럽게 살아오다니 네가 정령 신라의 화랑이더냐 ? 에끼 이놈 ! 우리 신라에는 네 같은 비겁한 화랑은 없으니 다시 적진에 들어가 싸우다가 죽거라 !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적과 싸우다가 죽거라 ! ”
아버지 김품일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은 관창은 아버지(김품일) 앞에 엎드려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살아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관창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적셨다. 관창은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이럇 ! 하며 말에 채칙을 가했다. 말은 피잉 울면서 백제의 진영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달려 오는 관창을 보고 계백을 단 칼에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말 안장에 피가 흐르는 관창의 목을 매달아 신라 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김품일은 죽어서 돌아온 관창의 머리를 잡고 피를 닦으며
“ 이제야 너는 화랑으로서 임무를 다 했구나. 참으로 장하구나 ! ”
관창의 죽음은 산라군의 사기를 높혔고 또한 전의(戰意)를 촉발시켰다. 전의에 불타는 5만의 신라군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계백의 5천 결사대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양쪽 군사들의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황산(논산) 벌판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붉은 피는 강물처럼 흐르면서 아우성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는 피비린내 나는 결전이었다. 백제의 군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의 상황을 넘어서지 못하고 계백의 결사대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백의 부하인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常永)은 목숨을 구걸하며 항복하였고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느새 궁성문 밖에는 당나라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의자왕은 이제 최후가 다가 왔음을 알았다.
“ 아 !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이로구나 ! 칠 백년 사직이 나에게서 끝나다니.... ”
의자왕의 한탄소리가 함께 눈물을 흘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