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칼럼 =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침묵으로 돌아간다

  • 등록 2024.11.11 09:5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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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침묵으로 돌아간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벽암록’의 파초혜(破草鞋)란 오래 신어서 망가진 짚신을 뜻하는데 아무 소용도 없 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원시인이 아니라면 사람에게는 신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공부를 해서 지식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필요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신발(shoes)이나 지식(learning)도 낡으면 쓸모 없어지지만 새 것도 때로는 소용이 없게 된다. 선(禪) 수행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지식은 망가진 짚신과 같다.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알몸이 되어야 할 때는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지식도, 아니 수준이 높은 지식일수록 오히려 망가진 짚신처럼 거추장스럽게 달라 붙은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 인생의 진실을 알게 되면 망가진 짚신을 다시 주워 올린다. 옛날 스님들은 망가진 짚신을 다시 고쳐 신기도 하고 그대로 썩어 퇴비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은 짚신 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식도 자기 마음의 밑거름으로 하거나 사람답게 살기위한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14세기 고승 관산혜현(關山慧玄) 스님은 한평생 설법이나 문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묵묵히’ 몸으로 선을 행사하는 선사이다. 그래서 스님의 설법이나 필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그의 출생지에서 오직 ‘묵(默)’이라는 한 글자만 쓴 족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상징하는 바가 크다.

 

독일의 의사이자 문필가로 유명한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은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비롯되어 침묵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선(禪)은 말에 대한 침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말과 침묵의 대립을 없앤 데서 선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진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명백한 진실은 설명하면 할수록 더욱 더 진실에서 멀어져 공허하게 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전에 부자이면서도 대승 불교의 이치를 깊이 깨달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침묵을 두고 ‘침목은 우레와 같다(一默如雷)’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론종(三論宗)의 시조인 중국 수(隨)나라의 가상(嘉祥)대사는 침묵에 대해 「말하면서도 말이 없는 것이요, 말이 있으면서도 말을 하고 있다. 큰 소리도 가독한데도 소리가 없고 한 소리도 없는데 그 목소리가 가득하다」고 했다. 침묵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자체이다. 그러므로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것과는 가치판단에서는 전혀 다르다. 문제는 말과 침묵의 대립에 구애됨이 없이, 또한 말과 침묵을 초월한 데에도 마물지 않고 말과 침묵의 상대성을 자유롭게 다루는 또 하나의 차원 높은 공(空)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8세기에 살았던 중국 당(唐)나라의 영가(永嘉)대사는 ‘증도가(證道歌)’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선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이요, 말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언제든지 몸은 편안하다(行赤禪坐赤禪, 語默動靜休安然)’라고 했다. 실상(實相)의 의미는 본성 등이라고 불교 사전」은 풀이라고 있다. ‘반야심경’의 번역자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하면 실상에는 공(空)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참된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용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존재는 사실은 현상으로서 ‘있는 듯 보일’뿐이라는 설명이다. 현상적인 존재이기에 생겨나서는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파괴되고 소멸해 간다. 이 불안정한 밑바닥에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참된 실체가 있다고 본다. ‘꽃잎은 저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한다. 지는 꽃잎은 현상적인 존재이며, 이 꽃은 떠 받치고 있는 변하지 않는 참된 실재가 ‘꽃’의 생명이다. 변하기 쉬운 현상의 밑바닥 그 깊숙이 이 변하지 않는 실재를 믿어야 비로소 인간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다.

 

동물이나 새들은 울음 소리를 낼 때, 인간들처럼 상호간에 의식적으로 통신을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 소리는 단순히 순간적인 상황에 따라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동물 행태학 권위자 ‘콘라드 Z. 로렌즈’ 씨에 의하면 동물들이 종종 의식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갈가마귀가 먹이를 먹다가 놀라면, “깍 깍”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솟아오르고, 그 울음 소리를 들은 다른 갈가마귀들도 자동적으로 날아 오른다. 위험을 알리는 울음 소리와 그에 따른 다른 갈가마귀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말을 하고 자기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권우상 기자 lsh8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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