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칼럼 = 술 항아리 속의 예쁜 얼굴

2024.07.10 10:29:52

 

 

 

 

 

칼럼

 

 

                               술 항아리 속의 예쁜 얼굴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옛날 한 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금실도 좋고 집안도 부유했다. 어느날 부부가 점심 밥을 먹으려는데 남편이 계속 아내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더욱 아름다웠다. 마침 술 생각이 나서 이럴 때 부부가 한 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얼른 눈치를 채고 말했다. “담아 놓은 술이 있는데 좀 가져 올게요.” 아내는 술 항아리를 열어보니 술이 맑았다. 그런데 술을 뜨려고 하는데 항아리 바닥에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그 여자가 움직이니 술 항아리 안의 여인도 움직였다. 그녀가 빙그레 웃자 술 항아리 안의 여인도 빙그레 웃었다. 항아리 속 여인은 무척 예쁘게 보였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아름다운 여인을 집안 어딘가에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화가 나서 남편에게 따졌다. “여자가 있으면서 왜 나와 결혼했어요?” 그러자 남편도 화가 나서 말했다. “왜 갑자기 생사람 잡을려는 거요. 술 항아리 안에 뭐가 있단 말이요?” 남편은 술 항아리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잘 생긴 남자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로 부부는 티각태각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그 집앞을 지나가다가 부부가 다투는 걸 알고 들어가 이유를 듣고 술 항아리 안을 들여다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스님은 부부에게 말했다. “싸우지 말고 술 항아리 안에 있는 사람을 나오게 해서 두 분과 대면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부는 스님을 따라 술 항아리가 놓여 있는 곳에 갔다. 그리고는 스님은 돌로 항아리를 내려쳐 깨트렸다. 항아리 안에는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었다. 그제서야 부부는 그들이 본 것이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 그림자임을 깨달았다.

 

이는 불경(구잡비유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혹시 우리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면서 인생을 이렇게 잘못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부처님의 말씀이다. “인생은 정말 짧다. 인생은 짧고 허망한 환영과 같다. 마치 술 항아리 속의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야기 속의 부부처럼 사람들은 헛된 환영에 비친 탐욕 때문에 하루도 편안하지 못하고 늘 투쟁과 반목, 질투를 하면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이 권력과 재력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무한한 탐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탐욕은 인간의 불선(不善 :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한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털어내자는 것이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싶다. 혹여 종교가 이런 인간의 불선(不善)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기 못한다면 그 종교는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도 마음에서 발현하기 때문에 생각이 잘못되면 마음이 상에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선(不善)한 생각에 의해 행동하고 많은 업(業)을 짓는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다 한 생각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말이 있다. 이 ‘바라밀’의 길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광명적인 양심이다. 양심은 아주 작은 흠집이 나더라도 그 느낌이 빠르다. 이 양심의 느낌이 느린 사람, 또한 둔감한 사람은 사특하고 간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형언할 수 없는 범죄는 모두가 양심의 부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일체의 방편을 교설하여 악(惡)에 오염되지 않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 발현의 길은 항상 믿음 속에서 강하게 싹터 오는 것이다. 조그만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나마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지고 있는 마음의 문을 우리는 항상 두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불의와 모순 그리고 곤혹과 빈곤을 느끼고 있는 자에게 평안과 안식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인간 양심을 재구성 하는 것을 본위로 삼는 문학보다 폭력적이거나 비도덕적 외설문학이 범람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도덕성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현실이다. 즉 황색문학(黃色文學)등 작품의 범람은 작가 자신의 창의성보다 독자의 취향에 상응하기 위한 작업이라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인간 윤리성은 함몰된 것이다. 영화, TV드라마, 연극, 음악, 미술, 무용 등 할 것 없이 산업문명에 예속되어 인간이 문학, 예술을 창조하는 본래의 기량에서 멀리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술 항아리 안에 숨겨 둔 애인’의 인간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유럽 중세 십자군전쟁 때는 남편이 군에 징집되면 부인은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정조대(貞操帶)를 차고 사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혹시 남편이 전사라도 하게 되면 여자는 본의 아니게 평생을 수절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권우상 기자 lsh8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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