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욕설, 폭언, 폭행, 우리 사회에서 근절돼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지난해 부산의 모 고등학고 학생 A(17) 군이 교실 앞 복도에서 교사 B(53) 씨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A군은 B교사의 뺨을 때리고 팔로 목을 감는 등 6차례에 걸쳐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은 A군이 자신의 등교 시간 등에 대해 B 교사가 생활지도를 한 것에 불만을 품고, B씨를 찾아가 다투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도 한 특성화고에서 수업중이던 여교사 A씨의 말을 끊으며 한 남학생이 "저랑 술이나 한 잔 하실래요?"라고 하자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사건 보도에 따르면 여교사 A씨는 처음에는「청소년기 아이가 분별없이 한 말이겠지」라며 참고 넘겼지만 이후에도 노골적으로 특정 대하면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A씨는 "성희롱을 당하는 기분이다"라며 "처음에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치부하려 했지만 건장한 학생들이 이 같은 발언을 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폭언, 욕설, 폭행으로 상처를 입은 분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보다 근전하고 밝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욕설, 폭언, 폭행 등도 증빙서류를 갖춰 정식으로 고소장을 제출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경찰의 현장 확인으로 처벌이 가능하도록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자연성을 상실한 타락한 인간과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혁신하는 일은 우리 어른들이 몫이다’ 라고 설파한 ‘룻소’의 말을 한번쯤 반추해 보았으면 싶다.
비록 한국만은 아니지만 똑똑한 사람과 못된 사람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흔히 못된 사람을 똑똑하다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상대방에게 불편함이나 폭언 또는 욕설로 마음에 상처를 받아도 참고 있으면 바보로 취급된다. 반면 작은 일에도 상대방에게 대들고 따지면 똑똑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요즘의 세상에서는 겸손이 설 땅을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매우 성공한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유한 유명 인사들의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자화자찬을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그러한 사람들은 성공한 것에 대한 영예를 자신에게 돌리며 잘난 체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책임감 있게 사는 것보다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세상에서, 겸손은 바람직한 특성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겸손하면 좋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겸손하게 행동할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나약한 사람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성서에서는 겸손을 높이 평가하고 배양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에 더해 겸손이라는 특성에 대한 균형 잡히고 긍정적인 견해를 알려 주며 참다운 겸손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강함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만의 한 가지 정의는 과도한 자기중심이다.
그러한 교만이 있으면 아마도 아름다운 외모, 인종, 지위, 재능, 재물과 같은 것들로 인해 자신이 중요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부당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성서는 ‘교만으로 우쭐대’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한다. (디모데후서째 3:4)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큰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겸손한 사람을 바보로 취급 하더라도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인생관이 아닌가 싶다. 겸손함은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욕설, 폭언, 폭행은 우리 사회에서 근절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