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5부 스물 다섯 번째회 (25)
천天. 지地. 인人. 명 命
한양(漢陽)에서 제주도(濟州道)까지는 길이 멀고 험란했다. 임지에 가기 위해 배비장(裵裨將) 일행은 새벽 일찍 밥을 지어먹고 출발했다. 천안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온양을 지나 공주를 거쳐 완주를 지나 전주부에 이른 것은 한양을 떠난 지 엿새 째가 되는 날이었다.
여기서 하루를 묵고 다시 떠나 남도로 내려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남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옛 풍습에 부임하는 길 근방에 퇴관(退官)한 정승이나 판서가 살고 있으면 반드시 문안을 드려야 했다. 그래서 김인경 역시 퇴관(退官)하여 그 고을에 사는 정승(政丞)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늙은 정승(政丞)이 사는 마을은 산골 깊숙한 곳이라 고개를 넘고 한참 가야만 겨우 집이 한두 채 있는 그런 오지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겨우 정승댁을 찾아 무사히 문안을 드리고 그날은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숙소가 문제였다. 신임 제주 목사 김인경은 그래도 정승댁 작은 사랑에서 하룻밤을 쉬어 갈 수 있었지만 목사를 수행하는 비장(裨將)들은 각각 민가를 찾아 자야 했다.
사람이란 벼슬을 얻고 부자가 되면 마음이 변하는 것인지, 김인경 역시 가난했을 때는 자기 마누라 손목도 변변히 마음놓고 잡지 못했으면서도 이제는 하루도 여자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산속 오지 마을에 수청들 기생은 커녕 주모도 없었다. 그래서 여러 비장들이 머리를 맺대고 의논을 했다.
“ 어찌하누 ? ”
“ 계집을 데려 오라고 저토록 성화니....”
“ 없으면 못 데려가지...”
이때 배비장(裵裨將)이 입을 열었다.
“ 비장이란 사또가 분부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오 ”
“ 암. 그렇고 말고.. ”
다른 비장들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 그러니까 이유 불문하고 하룻밤 사또를 수청들 여자를 구해야 하오 ”
“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수청들 여자를 구해 보겠다는 것인가 ? ”
다른 비장들이 반색을 하며 묻자 배비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 우리 비장들 중에 서열로 보면 배비장이 우리의 어른이니 사또께 충성도 제일 많이 해야 할 줄로 믿소 ! ”
배비장(裵裨將)은 은근히 자기가 이방이 되지 못한 화풀이를 이런 식으로 하려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어진 이방은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 그런 법은 없소. 비장이 되기 위해 돈을 많이 바친 것도 억울한데 이런 산중에서 계집을 구하는 어려운 일을 떠맡다니 안될 말이오. 그러지 말고 제비 뽑기를 해서 사또 수청들 계집을 구하는 소임을 맡도록 결정 합시다 ”
다른 비장들도 이방의 말에 찬성을 하자 배비장도 할 수 없이 제비뽑기에 찬성을 했다. 그런데 재수 없이 배비장이 뽑혀 버렸다. 배비장은 머리를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여러 의견으로 결정한 일이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비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형방인 윤비장과 둘이서 숙박 집을 찾아 나섰다. 배비장이 간 곳은 산 밑에 있는 단칸방 오두막집이었다.
“ 주인 있소 ? ”
부르는 소리에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사람은 예순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눈꼽이 잔뜩 끼고 쭈글쭈글한 얼굴에 눈을 껌벅이며 노파가 물었다.
“ 뉘신지요 ? ”
“ 할머니가 주인이오 ? 우리는 제주도로 가는 신임 목사의 수행원들인데 하룻밤 묵어 가야겠소 ”
배비장의 말에 노파는 펄쩍 뛰며 말했다.
“ 안됩니다 ”
“ 왜요 ? ”
“ 우리 집은 가난해서 손님을 대접할 쌀도 없소이다. 그리고 젊은 며느리와 단 둘이 살고 있으니 재워드릴 수 없소이다 ”
배비장은 젊은 며느리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 돈을 드리겠소. 그리고 할머니도 알다시피 이곳은 주막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서 신세를 지려는 것입니다. 제발 하룻밤만 재워 주십시오 ”
배비장은 할머니의 두 손을 모아 쥐고 통 사정을 했다. 노파는 돈 욕심 때문에 승낙하고 며느리를 불렀다.
“ 그럼 재워드리긴 재워드리리다. 얘 아가야 ! 나와서 손님 저녁상 차려 드려라 ”
며느리는 겨우 스무살 안팎의 나이로 입은 옷은 남루했지만 산골 여인답게 살결이 곱고 흰데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걸음을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제접 미인이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쪽지고 버드나무 비녀를 꽂았는데 삼베 헝겊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편을 잃은 모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