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자살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최
근 몇 년 동안, 청소년 자살 건수의 증가에 관해 논하이 넘치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들이 불필요하게 죽어 가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주요 뉴스에서 크게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자살률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나라 전체의 자살률이 높든 낮든 상관 없이,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자살률이 증가한다고 하는데 통계 자료를 훑어보면, 눈에 띄지 않게 유행하는 이 병이 지니고 있는 세계적인 특성도 알 수 있다. 최근 잡지 ‘깨어라!’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 방역 센터는, 65세 이상의 미국인들의 자살 건수가 1980년 이후로 36퍼센트나 증가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에서 노인의 수가 증가한 것이 어느 정도 그러한 증가의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1996년에는 65세가 넘은 사람들의 실제 자살률도 40년 만에 처음으로 9퍼센트나 증가하였다. 미국 노인의 경우, 부상으로 인한 사망 원인 가운데 낙상(落傷)과 교통 사고 다음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살이었다. 놀랄 정도로 높은 이 수치도 사실은 너무 낮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망 원인 증명서를 근거로 작성한 통계 자료에 자살 건수가 너무 줄여서 적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자살 연구 편람」(A Handbook for the Study of Suicide)에서는 알려 준다. 일부 사람들은 실제 수치는 보고된 통계 수치보다 배는 더 클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그 책에서는 부언한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눈에 띄지 않게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노인들의 자살이라는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살 문제 전문가인 허버트 헨딘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미국의 자살률은 연령층이 높아짐에 따라 뚜렷하게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도, 노인들의 자살은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헨딘 박사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노인들의 자살률은 항상 높았기 때문에 “청소년 자살의 경우처럼 급격한 증가에 따르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조성하지 못했다”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한다.
한국도 자살하는 숫자가 세계 상위에 올라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날려진 사살이다. 인터넷 악성 댓글로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에 대한 대책도 시급해 보인다. 인터넷 강국이라면서도 인터넷 범죄 예방책은 허술한 것이 사실이다. 온갖 악성 댓글이 난무하면서 남을 비방하거나 모욕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처벌이 쉽지 않아 본인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한 충동적 자살로 이어지고 있어 문제다. 특히 연예인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인터넷 악성 댓글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곧바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지만 자살자는 계속 증가하는 모습이다.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삶은 일회성이다. 우리의 삶은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도 다른 무엇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진실된 순간들이다. 이 순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묻는 존재이다. “내가 왜 사는가?“ 하는 물음이 끝날 때 그의 삶도 끝나는 것이다. 어두운 것을 밝히며 분명치 않은 것을 분명케 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물음이 해답되어져야 한다는 소박한 낙관을 지닌다. 물음이 있기 때문에 해답도 당연히 뒤따라야 된다는 생각이다.
생물도 인간도 안정을 구한다. 수억 만분의 일의 확률이지만 무기질이 유기체로 형성되었을 때 옛날의 고향이 그리웠다. 즉자적인 안정만이 있던 그 곳을 말이다. 유기체는 옛날의 고향에 비하면 엄청난 불안정이다. 이 불안정을 이기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옛날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죽음이요, 하나는 주어진 자기의 조건하에서 최고의 완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생물은 생명이라는 조건이 주어진 한도에서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생존의 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지성은 최대한의 삶을 시현시키는 편에 서야 할 것 같다. 죽음과의 대결에서 삶은 약자이니까 삶과 죽음의 저울대의 평행을 잡아 주기 위해서라도 지성(知性)은 죽음을 거부해야 한다. 창조의 일로써 삶을 뻗어가야 한다. 자살자는 삶의 허무를 믿으며 많은 이유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는 이지적(理智的) 추리(推理)보다는 기분에 호소하며, 혹은 발작적으로 죽음에 뛰어든다. 삶은 고통의 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종교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원의 길중에는 ‘사랑’이 있다. 헌신적인 사랑이 있을 때 삶은 고통의 길에서 행복의 길로 들어선다. 삶은 비관할 것도 낙관할 것도 아니다. 삶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다. 너무 비관하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원활이 처리할 수 없는 자의 변명이다. 너무 낙관하는 것은 더 큰 비관의 시초일 때가 많다. 대부분 살아갈 희망이 없고 절망적일 때 자살한다. 하지만 그 절망이 새로운 삶의 전환기가 될 수 있다.
나는 40대 나이에 사업을 했다가 실패하여 자살을 결심한 일이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명리학을 연구했다. 자살이든 사고든 요절하는 사람은 사주명국에 자사(子巳), 축인(丑寅), 인진(寅辰), 묘미(卯未), 진사(辰巳), 사인(巳寅), 오진(午辰), 미미(未未), 신사(申巳), 유인(酉寅) 등이 용신과 형충되거나 대운, 세운, 심지어 월운, 일운 등과 충(沖)이나 형(刑), 파(破)가 되는 경우이다. 또한 백호살인 갑진(甲辰), 을미(乙未), 병진(丙辰), 정축(丁丑), 무진(戊辰), 임술(壬戌), 계축(癸丑)이 대운, 세운에서 형충이 되면 사고가 교통사고나 붕괴사고 등이 발생하거나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자살을 결심해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이 있다. 이 모두가 타고난 명운에서 결정된다. 부자라도 빈곤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곤해도 부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언젠가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끝이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의문은 종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한 순간 절망은 용기로 억제하고 희망은 마음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