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 다라국의 후예들 제1부 제22부

  • 등록 2020.04.07 11: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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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장편 역사소설 제1부 제22회

 

 

                      다라국의 후예들

 

 

이 무렵 걸손국(九州 : 구주)은 여러 부족끼리 분쟁이 잦았다. 그래서 늘 권력 다툼으로 하루도 나라가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일모(日恈 : 히호고)가 나이 12살이 되던 해 이소지는 부족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웅본국(熊本國)을 세우자 걸손국은 같은 땅(九州 : 구주)에서 옹본국과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웅본국의 왕이 된 이소지와 왕비 미파왕후는 전국에 흩어진 무사들을 끌어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렸다. 미파왕후(美巴王后)는 새삼 지난날 효동(孝童)이 하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혹여 여건이 좋지 않아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공주님의 뱃속에 든 아이라도 반드시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입니다’

하는 말이었다. 미파왕후는 잠이 오자 않아 방에서 나와 보름달이 높이 뜬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효동님!, 당신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들 일모가 이제 웅본국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면 왕이 될 것입니다. 꿈을 이루지 못해 구천에 서 방황하고 계시다면 이제 영혼이라도 편히 쉬십시오”

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때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미파왕후(美巴王后)가 뒤를 돌아보니 일모(日恈 : 히호고)였습니다. 미파왕후는 깜짝 놀랐다.

“히호고, 자지 않고 왜 나왔느냐?”

일모(日侔 : 히호고)는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보니 어머니 계시지 않아 나왔다고 했다. 미파왕후는 일모의 손을 잡고 침소로 향했다. 미파왕후는 일모의 아버지가 효동이며 효동이 사망한 연유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효동이 왕손이 아니라 평민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만일 일모(日侔. 히호고)의 아버지(효동)가 왕손이 아니라 평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이곳 사무라이(武士)들이 혈통을 문제 삼아 왕후 자리를 박탈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모(히호고)는 어머니(美巴王后)에게 효도가 극진했다.

 

한편 임라국(대마도)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심한 풍랑에 배가 전복되어 바다에 빠진 효동(孝童)은 구사일생으로 인근을 지나던 뱃사람의 도움으로 구조됐다. 이 배의 선주는 탁순국(진해)에서 무역을 하는 상단의 대행수 고방촌(高方村)이었다. 고방촌은 바다에 빠져 죽기 직전 효동을 구조한 상단의 배가 탁순국(卓淳國)에 도착한 것은 사흘이 지난 후였다. 고방촌은 효동을 수상하다면서 관아로 넘기려는 태도를 취하자 효동은 고방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효동은 관아에 넘기면 어찌되는 것이냐고 묻자 고방촌은 관아에서는 탁순국에서 미파공주와 도망친 효동이 다시 탁순국에 온 경위를 조사할 것이고, 만약 효동이 미파공주와 도망친 사실이 탄로나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효동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만일 관아에 가서 조사를 받는다면 탁순국의 거타지왕의 딸 미파공주를 데리고 탈출한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계속>

 

 

 

 

 

 

 

 

권우상 기자 lsh8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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