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연작소설 - 천.지.인.명 제2부 아홉 번째 (9)
천天. 지地. 인人. 명 命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훈련대장인 이완(李完)은 어느날 소실의 집에서 마음을 놓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이 들어 있을 무렵, 효종 대왕께서 별감을 시켜 긴급히 볼일이 있으니 즉각 입궐하라는 분부가 내렸다. 그래서 조복을 입고 급히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소실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 대감 ! 상감께서 이 밤중에 부르시는 것이 암만해도 심상치 않은 일이옵니다. 만일을 대비하시어 갑옷을 입으시고 그 위에다가 조복을 입으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
하고 말하자 이완(李完) 대장은
“ 옳은 말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으니 네 말이 옳다 ! ”
하고는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조복을 입고는 대궐문을 막 들어서자 등불이 일시에 꺼지며 화살이 빗발치듯 날라 들었다. 이완(李完) 대장은 영문을 모르고 황황한 걸음으로 어전(御殿)에 들어가자 불이 꺼졌다. 용상에 앉은 효종(孝宗) 대왕은 빙그레 웃으며
“ 어찌 입궐하였소 ? ”
“ 무슨 변고가 있사옵니까 ? ”
“ 참으로 장하여라. 장군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치밀해야 하는데 이완 대장의 부단한 주의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였소 ! ”
하며 효종(孝宗) 대왕은 몸소 차를 은잔에 따루어 권했다. 효종 대왕은 잠시 숨을 돌리게 한 뒤 황모 무심 대필 한 자루를 이완(李完) 대장에게 하사했다. 이완 대장은 효종 대왕에게 하사 받은 붓을 황감히 받아들고 퇴궐했다. 집에 돌아 온 이완 대장을 보고 소실이 물었다.
“ 상감께서 무슨 말씀이나 하사하시는 것이 없었사옵니까 ? ”
“ 하사하시는 것이 있었다 ”
“ 무엇입니까 ? ”
“ 붓 한 자루 ”
소실은 모필을 이완(李完) 대장의 소매에서 꺼내어 들고 이리저리 보면서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이렇게 물었다.
“ 이것을 어째서 내리셨을까요 ? ”
“ 글쎄.......”
“ 무인에게 칼을 하사하시는 것은 모르지만 붓을 하사하시다니.... 어리석은 소첩의 생각으로는 심상한 붓 같지가 않사옵니다. 칼로 이 붓대를 쪼개어 보십시오 ”
“ 그게 무슨 말이냐 ? 임금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함부로 깨뜨리는 법도 있나 ? ”
“ 소첩의 생각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무인(武人)에게 칼이 아닌 붓을 하사하실 때에는 필경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옵니다 ”
“ 까닭이라........”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이완(李完) 대장은
“ 그도 그럴듯하다. 네 생각대로 쪼개보자 ! ”
하고는 이완(李完) 대장은 벽에 걸린 은장도를 내려 붓대를 쪼개었다. 그러자 돌돌 말은 종이가 붓 속에서 나왔다. 이완 대장은 얼른 종이를 집어서 펴 보았다. 효종(孝宗) 대왕의 친필 칙서(親筆勅書)였다. 이완 대장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 명일(明日) 인시(寅時)에 만(萬) 군(軍)을 인솔하고 남문(南門)으로 입성(入城)하여 삼문(三門)을 두드리라 - 는 어명이었다. 자정을 알리는 인경이 땡땡 울리고 있었다.
“ 태평시절인 이 밤중에 만 명의 대군을 어찌 동원할 것이며 굳게 닫힌 남문과 성첩을 어찌 파괴할까.... ”
이완(李完) 대장은 소실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힘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대감 ! 생각하셨습니까 ? ”
“ 글쎄...”
“ 대감 생각은 대감 생각이구 소첩의 생각은 소첩 생각입니다만 이렇게 하시면 어떠하실까요 ? ”
“ 어떻게 ? ”
“ 즉시 영문(營門)에 거병하시고 군기고에서 무명 천 필과 사침(絲針)을 꺼내어 군사들에게 일제히 내주어 자루를 하나씩 만들게 하고 노들강변에 가서 모래를 가득히 담아 메고 남대문 성에다가 쌓아서 월성(越城)을 하도록 하심이 좋을까 생각하옵니다 ”
소실의 말을 들은 이완(李完) 대장은 옳거니 싶어 무릎을 탁치며 벌떡 일어났다. 곧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허리에 찬 이완 대장은 두 손으로 갑옷의 끈을 매고 서 있는 소실의 머리를 힘껏 얼싸안았다. 소실의 두 귀는 이완 대장의 두 손에 붙들렸다. 소실은 발돋음 하여 이완 대장의 수염을 헤치며
“ 대감 !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사옵니다. 어두운데 조심하십시요 ”
이 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뒤끓는 군졸들은 훈련대장의 명령이니 명령대로 따를 뿐 감히 무슨 이유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삽시간에 주머니 하나씩을 만든 만 명의 군졸들은 한걸음에 노들강변으로 달려갔다. 지금까지 이런 비상소집을 해 본 일이 없었던지라 여기 저기 곳곳에서 소란이 생겨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