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우상 연재소설 - 나를 살려준 남자 제8부 오십 한 번째회 (51)
나를 살려준 남자
내가 권성해 선생님을 만나고 온 후 권성해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비관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고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다.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권성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접곤 하였다.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무려 2년동안이나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권성해 선생님을, 권성해 선생님 역시 혼자 사는 나를 영혼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 하는 동안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육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권성해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권성해 선생님은 나를 딸처럼 귀여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사는 마을이 재개발 공사가 착수되면서 어렵게 달세로 살던 집을 내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일은 5년전부터 추진해 오던 일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집을 철거해야 하게 되었다. 집 주인은 보상비를 받지만 나는 달세로 살고 있는 터이라 보상도 없이 그대로 집을 옮겨야 할 입장이었다.
돈은 없고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할 지 난감했다. 더구나 나는 가수와 무용수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무대의상이 많았다. 그래서 의상실과 기거하는 방 2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루 하루 집을 철거하는 날이 다가오자 오갈데가 없는 나는 다급한 마음에 권성해 선생님에게 전화로 나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선생님. 제가 달세로 사는 집이 철거를 당하게 되었어요. 5년전부터 재개발지역이 되어 있었는데 이젠 집을 철거해야 하는가 봐요. 집을 얻어야 하는데 방 얻을 돈은 없고 난감하네요. 더구나 의상이 많아 방은 2개 짜리 집을 얻어야 하는데요.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내 말에 권성해 선생님은 설마 길바닥에 나와 앉기야 하겠느냐고 하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면서 별로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무척 급한데 권성해 선생님은 느긋하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은 섭섭했다. 나는 빨리 집을 비우라는 독촉에 다급하여 며칠 후 또 다시 권성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권성해 선생님은 역시 태연스럽게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고 정말 갈 때가 없으면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계세요.”
나는 다급한데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갈 곳이 없으면 오라고 하니 조금전의 섭섭한 마음은 지워졌다.
그로부터 며칠후 나는 무조건 권성해 선생님에게 의지할려고 이삿짐을 싸서 트럭에 싣고 경남 양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넓은 정원에 방이 넓은 2개에 방이 8개나 되는 3층 단독주택에 사시는 권성해 선생님 집에 들어 갔다. 그렇게 해서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누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부부로 결합 되었다. 그때 권성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젊은 부인을 얻은 것도 내 팔자요 마흔 하나인 젊은 과부가 일흔이 넘은 남편을 얻은 것도 다 팔자가 아니겠어요.”
하면서 나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내가 평생에 하고 싶었던 가수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시면서 ‘강민숙 콘서트’틀 준비해 주겠다는 권성해 선생님의 말을 듣자 감격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부부로 만난 후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모처럼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양산천 둑길 근린공원을 산책하였다. 맑은 가을하늘 아래엔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고개짓 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들의 행복을 축하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팔자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권성해 선생님이야말로 절망에 놓인 나를 살려준 남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