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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인물

조선조 500년간 “구미시장” 임명대장(龜尾市長任命臺帳)을 정리

선산부사 218명, 인동부사 218명으로 총436명의 약전을 작성

 
부사로 金宗直·宋純·李彦迪·柳雲龍·李輔·金涌·趙纘韓·金應祖·朴毅長 등 거처가

구미시청에서 정년퇴직하고 구미향토사에 정통한 이택용<李澤容(61)>씨 회갑기념으로
10여년을 고생하여 ‘선산·인동도호부선생안해제’를 간행
현재, 한주이진상기념사업회 이사로 재직

구미시는 朝鮮時代에는 善山府와 仁同府로 두개 큰 고을이었다. 고을에는 守令인 府尹·大都護府使·牧使·都護府使·郡守·縣令·縣監이 行政의 最高 責任者였다. 구미시청에 勤務하면서도 그리고 退職後에도 늘 歷代의 守令 名單인 先生案을 整理하고 解題를 만들고 싶었다. 先生案은 그 고을의 代表性이 있는 文獻이고 記錄이기 때문이다. 10餘年에 걸쳐 資料를 整理하고 守令을 歷任한 門中과 連絡하고 資料를 蒐集하여 이제 빛을 보게 되었다.

守令이란 高麗와 朝鮮時代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地方官의 總稱을 말하며, 또한 守令은 郡守와 縣令을 합한 말이라고도 하고, 守는 守土養民, 令은 命令을 받들어 施行한다는 뜻이라고도 解釋한다. 俗稱 원님이라고도 한다. 守令은 한 地域의 立法, 司法, 行政을 總括하며 軍政도 兼하여 管掌하였다. 이 때문에 君主를 代身하여 統治하는 者, 牧民官등으로 불리며 歷代로 그 役割이 중시되었다.

守令에 해당하는 地方官은 統一新羅時代에 처음 派遣되었다. 9州 아래 120郡과 305縣을 두고 郡에는 太守, 縣에는 縣令을 派遣했다. 後三國에서 高麗初期까지의 混亂期에는 守令을 派遣하지 못하다가 成宗 2年(983)에 12牧을 설치하여 牧使를 派遣했다.

이후 郡縣制의 整備課程과 맞추어 地方官을 계속 派遣했다. 高麗의 守令으로는 留守府의 留守와 州·府·郡·縣의 知事·縣令등이 있었다. 高麗中期 이후에는 屬縣에 派遣하는 監務가 增加했다.

그러나 高麗時代에는 守令이 없는 郡縣이 더 많았으며, 高位官 보다는 下級官인 縣令·監務의 數가 많았다.

朝鮮初期에 郡縣制를 整備하면서 守令의 數가 增加하고 守令의 權限도 增進되었다. 太宗때는 監務를 縣監으로 바꾸고 종6품관으로 했다. 經國大典에 따르면 府尹(종2품)이 4명, 大都護府使(정3품)가 4명, 牧使(정3품)가 20명, 都護府使(종3품)가 44명, 郡守(종4품)가 82명, 縣令(종5품)이 34명, 縣監(종6품)이 141명으로 총 329명이었다.

大典會通에서는 5府, 5大都護府, 20牧, 75都護府, 77郡, 148縣이 되었다. 守令의 選拔과 運營制度도 改善했다. 守令選拔을 위해 守令取才를 만들었는데, 經國大典에 따르면 四書五經 중 1책과 大明律·經國大典을 講으로 試驗보고, 製述로는 百姓을 다스리는 方策을 試驗보았다.

守令의 任務를 規程한 守令七事를 制定하고, 觀察使가 每年 2회 項目別로 褒貶하여 報告하게 했다. 守令의 任期가 짧아 現地狀況을 잘 모르고, 잦은 交替로 地域民의 負擔이 크다고 하여 守令은 久任制를 施行했는데, 世宗때에는 任期 6年의 六期法을 施行하다가 經國大典에는 5年으로 규정되었다.

守令의 資質을 높이고 高級資源의 外官忌避 傾向을 防止하기 위해 京外官循環制를 만들어 中間에 辭免한 者와 外任을 忌避한 者는 그 任期 동안 使用하지 않고 다시 敍用할 때에는 外官으로 任命되게 했다.

世宗은 守令任命者를 일일이 面對하고 善治를 付託했는데, 이것은 後代까지 慣例가 되었다. 守令은 觀察使와 中央에서 繼續派遣되는 御使와 監察의 監視를 받았기 때문에 守令의 中途罷免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綱常의 原則에 따라 고을민은 守令의 잘못을 告發할 수 없게 했다. 土着勢力과의 結託을 防止하기 위해 本鄕이나 自己田莊이 있는 곳에는 派遣하지 않았는데, 老父母가 있는 경우 특별히 本鄕의 守令으로 任命하기도 했다. 以上의 改革은 中央集權的 統治構造의 强化에 크게 寄與했다.

그러나 16世紀以後 상당수의 規程들은 形式的이 되었다. 守令도 차츰 資質이 부족한 사람이나 請託者들이 많이 任命되었다. 朝鮮後期에는 아예 文科·武科·蔭敍의 入仕路에 따라 任命하는 郡縣을 固定시켜 運營했다. 上級守令과 重要地域에는 文科出身을, 沿邊에는 武科, 中小郡縣에는 蔭科出身을 多數起用했다. 19世紀에는 많은 守令職이 賣官賣職의 對象이 되어 이들의 貪虐을 助長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우리고을 善山은 郡守에서 都護府使로 仁同은 縣監에서 都護府使로 變遷했다.

저자도 旣存 두 고을의 先生案을 가지고 三國史記, 高麗史, 世宗實錄地理志, 東國輿地勝覽, 慶尙道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의 與地考, 與地圖書, 慶尙道邑誌, 東國與地備考, 大東地志, 嶺南邑誌, 朝鮮各道邑誌, 善山邑誌, 善山府邑誌, 仁同邑誌, 仁同府邑誌, 玉山誌, 嶠南誌, 朝鮮王朝實錄, 門中의 文蹟·文集등을 가지고 誤字와 脫字 그리고 우리 고을 守令을 歷任한 先生의 436명 略傳을 만들어서 先生案을 整理하였다. 오랜 시간 노력하였으나 아직도 記錄을 찾을 수 없어 未備하고 나름으로 整理를 했으나 잘못된 部分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未備하고 잘못된 부분의 課題는 次後에 後學이 다시 整理해주길 바랄 뿐이다.

資料를 整理하는 동안에 門中의 後孫들에게 激勵와 稱讚도 많이 받고, 叱責도 있었다. 저자의 不德한 所致로 생각한다. 善山府使를 歷任한 218名 중에 權輗, 金箕憲, 金萬增, 金應祖, 南夢賚, 宋堯和, 呂孝曾, 尹仁涵, 李采, 全益禧, 丁思愼, 趙斗壽, 趙榮祿, 趙纘韓先生과 仁同縣監·府使를 歷任한 218名 중에 金復元, 朴增輝, 成震丙, 柳雲龍, 李輔, 蔡獻徵先生의 門中에는 資料를 提供하여 준 好意에 感謝를 表한다.

特異한 事項으로는 資料整理 중에 父子分이 守令을 歷任한 安夢尹과 安應昌, 李鄧林과 李彦英, 鄭是先과 鄭錫範, 閔百宗과 閔斗爀, 丁胤祉와 丁好恕가 있으며, 兄弟間은 宋堯卿과 宋堯和, 善山과 仁同 의 두 고을 守令을 歷任한 金應祖와 李惕然, 祖孫間으로는 趙纘韓과 趙龜祥, 連任으로 勤務한 朴命燮·趙駿九, 丈人과 壻로는 宋堯和와 金致恭, 우리 고을出身으로는 康生敏, 朴增輝, 朴來命이 있다.

 
저자는 跋文에서 千思萬感이 交替하고 삶에 대한 다짐을 더 크게 하고 싶다. 學問이나 藝術을 하는 사람이든, 權力을 가진 사람이든 어느 정도 位置나 水準에 이르면 그 인기와 權力, 地位를 누리고 活用하는데 머무르고 더 이상 自身을 충전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 現實이다.

그렇지 않고 나는 이제부터라도 恒常 뒤를 돌아보고, 이 정도의 名譽와 60살에 이른 내가 오로지 더 나은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꿈을 불어넣으려는 데 몰두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냐 정말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어느 정도 位置에 오르면 그 分野가 무엇이든 간에 그 인기나 지위를 활용해 外道를 하거나 개인적 慾心을 챙기는 사람들과는 나는 次元을 달리하겠다.

그런 熱情과 순수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 열정이 식지 않은 만큼 나는 70살이 되고 80살이 되어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喜悅을 주고 謙遜한 모습으로 鄕土史를 硏究하고, 傳統文化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硏究하는 모습을 繼續 보여주고 싶다.

2002년도 ‘善山 · 仁同府古詩文集’을 出版하면서 跋文에 제2집 을 續刊 한다고 말했다. 아직 資料만 많이 모아두고 實踐을 못하고 있으며, 2006년 公職에서 停年退職을 하면서 退職記念으로 ‘新牧民心書’를 出版했으며 그 해에 (社)嶺南儒敎文化振興院에서 주관한 ‘龜尾歷史와 人物大觀’을 編纂해서 出版을 하였다. 바쁘다는 말로 ‘善山 · 仁同府古詩文集’ 續刊을 發刊 못 한 것이 늘 걱정이다.

올해는 回甲이다. 그래서 10여 년간 資料를 정리해둔 ‘善山·仁同都護府先生案解題’를 먼저 發刊하기로 하고 이제 마무리가 되었다. 明年에는 꼭 ‘善山·仁同府古詩文集’ 續刊을 또 다시 約束한다.

許穆선생의 文集 ‘記言’의 自序에서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일을 많이 벌이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고, 일이 많으면 해가 많은 것이다. 安樂을 반드시 경계하여, 후회할 짓을 행하지 말라. 뭐 다칠 일이 있으랴 하고 말하지 말라. 그 禍가 자라게 될 것이다. 뭐 害가 되랴 하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커질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귀신이 사람을 엿볼 것이다.

불꽃이 붙기 시작할 때 끄지 않으면, 치솟는 火炎을 어찌하며, 물이 졸졸 흐를 때 막지 않으면, 끝내는 넓은 江河가 될 것이며, 실낱같이 가늘 때 끊지 아니하면, 그물처럼 될 것이요, 터럭 끝처럼 작을 때 뽑지 않으면, 장차는 도끼자루를 써야 할 것이니, 진실로 삼갈 수 있음이 福의 근원이다. 그리고 입은 무슨 해가 되는가? 禍의 문이 된다.’ 라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라고 발간 후기를 마무리했다.

이택용(李澤容)
1949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상주농잠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전문과정) 행정학과 수료
한국방송통신대학교(학부과정) 법학과 수료
지방공무원(의성군 · 구미시) 36년 근무 정년퇴임
구미의 무형문화재 (2001년 발간 공저)
선산 · 인동부 고시문집 (2002년 발간)
신목민심서 (2006 발간)
구미역사와 인물대관 (2006 편찬)
내일신문 ‘선산의 사마방목’ 연재
내일신문 ‘종택 답사기’ 연재
경북매일신문 ‘금오산칼럼’ 연재
구미신문 ‘선산고을의 역사를 알자’ 연재
구미신문 ‘인동도호부’ 연재
경북중부신문 ‘중부제언’, ‘이택용의 사(思)’ 연재
구미1신문 "晩濃의 우리고을이야기" 연재
영남대학교박물관 ‘박물관 문화강좌과정’ 수료
왕산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역임
경북중부신문사 편집위원 역임
현)부산교육대학교 한국어문교육학회 회원
현)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특별연구원
현)한주이진상기념사업회 이사
이메일 lee79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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