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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權禹相) 칼럼 = 종교는 보험으로 생각하고 믿어야

 

 

칼럼

 

 

종교는 보험으로 생각하고 믿어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종교가 있는 것도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천국 또는 지옥이 있다’거나 ‘인간이 죽으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등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천국이나 지옥 또는 환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갖지 않는 것보다 갖는 것이 유리한 측면도 없다 않다. 천국이나 환생이 있는지를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후에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환언하면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면 천국으로 가거나 환생하는 것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경제학의 기본원리가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학의 기본원리에 의하면 미래의 불확실한 사고나 위험을 담보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자동차나 질병 등의 보험에 가입한다. 그러므로 사후의 불확실한 세계를 담보하기 위하여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험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천국이나 환생이 있는지 또는 지옥이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에 종교라고 하는 일종의 보험(Insurance-in- kind)에 가입하면 최소한 천국이나 환생을 담보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따라서 천국이나 환생 또는 지옥의 존재를 따지지 말고 종교를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자동차나 질병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사고나 질병에 대비해서 가입하는 것처럼 사람도 천국이나 환생이 있느냐에 대해서 논쟁을 벌리지말고 사후에 대비하여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필자도 사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많다. 그러나 하늘에 뜬 구름을 잡듯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종교와 보험의 원리를 알게 되자 종교를 사후의 보험으로 생각하여 종교를 갖게 되었다. 물론 형이상학적인 종교 문제를 경제학의 기본원리에 대입시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사후의 보험으로 인식하게 된 데에는 종교를 갖지 않는 것보다 갖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사는 친구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을 간 일이 있다. 그 친구는 나를 미국 인디언(American indian) 촌으로 데려가서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 친구는 우랄 알타이어족들이 바로 미국 인디언들의 조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인디언들의 생김새는 동양인과 비슷한 데가 있었고 언동에서도 상당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오랜 세월 전에 알라스카의 얼음바다를 통해서 우랄알타이족들이 알라스카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기원에 대해 상세하게 애기를 했다. 그 친구가 합리적으로 종교를 나에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 친구도 나와의 대화중에서 종교를 불학실성의 세계에서 보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룻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모든 일과 신(神)에 대해서 겸손하여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우주 속의 수 많은 미세한 티끌 중의 하나인 우리 인간이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또는 세상을 손안에 거머쥘 것처럼 날뛰어서는 안된다. 바다밑의 수 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와 같은 우리 인간들은 모든 일에 겸손하고 인간으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종교를 통해서나마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와 열반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은 곧 우리들 자신의 한 부분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보다 엄숙할 수 밖에 없다. 삶에는 한 두차례 시행착오가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 (본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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