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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權禹相) 칼럼 = 인간의 죽음. 자살과 운명

 

 

 

칼럼

 

 

                       인간의 죽음, 자살과 운명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기업가, 연예인, 정치인 등 자살 사건이 자주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가운데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안따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명리학에서 보면 자살도 운명이다. 지난해 언론 보도에 따르면 3년동안 자살한 사람이 일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인터넷 악성 댓글로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에 대한 대책도 시급해 보인다. 인터넷 강국이라면서도 인터넷 범죄 예방책은 허술한 것이 사실이다. 온갖 악성 댓글이 난무하면서 남을 비방하거나 모욕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처벌이 쉽지 않아 본인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한 충동적 자살로 이어지고 있어 문제다. 특히 연예인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인터넷 악성 댓글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곧바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지만 자살자는 계속 증가하는 모습이다.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삶은 일회성이다. 우리의 삶은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도 다른 무엇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진실된 순간들이다. 이 순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묻는 존재이다. “내가 왜 사는가?“ 하는 물음이 끝날 때 그의 삶도 끝나는 것이다. 어두운 것을 밝히며 분명치 않은 것을 분명케 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물음이 해답되어져야 한다는 소박한 낙관을 지닌다. 물음이 있기 때문에 해답도 당연히 뒤따라야 된다는 생각이다. 생물도 인간도 안정을 구한다. 수억 만분의 일의 확률이지만 무기질이 유기체로 형성되었을 때 옛날의 고향이 그리웠다. 즉자적인 안정만이 있던 그 곳을 말이다. 유기체는 옛날의 고향에 비하면 엄청난 불안정이다. 이 불안정을 이기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옛날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죽음이요, 하나는 주어진 자기의 조건하에서 최고의 완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생물은 생명이라는 조건이 주어진 한도에서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생존의 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지성은 최대한의 삶을 시현시키는 편에 서야 할 것 같다. 죽음과의 대결에서 삶은 약자이니까 삶과 죽음의 저울대의 평행을 잡아 주기 위해서라도 지성(知性)은 죽음을 거부해야 한다. 창조의 일로써 삶을 뻗어가야 한다. 자살자는 삶의 허무를 믿으며 많은 이유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는 이지적(理智的) 추리(推理)보다는 기분에 호소하며, 혹은 발작적으로 죽음에 뛰어든다. 삶은 고통의 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종교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원의 길중에는 ‘사랑’이 있다. 헌신적인 사랑이 있을 때 삶은 고통의 길에서 행복의 길로 들어선다. 삶은 비관할 것도 낙관할 것도 아니다. 삶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다. 너무 비관하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원활이 처리할 수 없는 자의 변명이다. 너무 낙관하는 것은 더 큰 비관의 시초일 때가 많다. 대부분 살아갈 희망이 없고 절망적일 때 자살한다. 하지만 그 절망이 새로운 삶의 전환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40대 나이에 사업을 했다가 실패하여 자살을 결심한 일이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명리학을 연구했다.

 

 

자살이든 사고든 요절하는 사람은 사주명국에 자사(子巳), 축인(丑寅), 인진(寅辰), 묘미(卯未), 진사(辰巳), 사인(巳寅), 오진(午辰), 미미(未未), 신사(申巳), 유인(酉寅) 등이 용신과 형충되거나 대운, 세운, 심지어 월운, 일운 등과 충(沖)이나 형(刑), 파(破)가 되는 경우이다. 또한 백호살인 갑진(甲辰), 을미(乙未), 병진(丙辰), 정축(丁丑), 무진(戊辰), 임술(壬戌), 계축(癸丑)이 대운, 세운에서 형충이 되면 사고가 교통사고나 붕괴사고 등이 발생하거나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자살을 결심해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이 있다. 이 모두가 타고난 명운에서 결정된다. 부자라도 빈곤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곤해도 부자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언젠가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끝이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의문은 종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한 순간 절망은 용기로 억제하고 희망은 마음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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