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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전쟁은 정보가 승리를 결정한다

 

 

 

칼럼

 

 

         전쟁은 정보가 승리를 결정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손자병법의 「적을 알고 자신은 아는 것」의 우열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미국과 일본 해군의 정보전이었다. 1942년 4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은 해군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군령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드웨이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미국의 항공모함을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둘리틀(James H. Doolittle)의 동경공습으로 기세가 왕성해진 미국 해군 기동부대를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유인한 후 단번에 궤멸시키겠다는 투기적 요소가 짙은 작전이었다. 나미츠 제독이 이끄는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일본 해군의 동향이 분주한 것을 보고 연합함대가 대규모 작전을 준비중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일본 해군의 암호 정보를 해독하여 그 내용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전략상무용 암호서 「D암호」는 전문에 사용하던 단어 3만 3300개를 각각 5행의 숫자로 바꾸고, 5만 단어에서 만들어지는 5행의 난수를 더해 암호문으로 다시 짠 것이다. 일본 해군은 이 D암호의 안전성을 과신하여 절대 해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암호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그 특징을 알고 사용된 전보 통수가 있으면 통계 처리로 해독이 가능하다. 놀랍게도 미국은 120명에 달하는 암호해독반과 IBM의 전기계산 장치를 전폭적으로 활용하여 5월 하순에 작전의 발동 시기와 부대 편성, 작전요령까지 일본의 함장이 아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플래처와 스프루언스 두 대장이 이끄는 2개 기동대에게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정보전에는 상대의 정보를 입수하는 「정보」와 상대에게 자신의 정보가 누설되지 않게 하는 「대정보」 두 가지가 있는데. 당시 일본 해군은 「정보」 「대정보」 모두 허술했다. 미드웨이 공격에 임하는 일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지휘관,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는 이 해전이 일어나기 직전 7항에 달하는 「상황판단」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보면 ✦적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고 우리의 공격작전이 진척된 후에야 출동하여 반격할 것이다. ✦적은 우리의 작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적의 항공모함은 미드웨이 부근의 해면에서는 행동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적의 기동부대가 반격해 온다면 격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등이었다. 나구모의 상항 판단에서 보듯이 일본은 미국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복수는 지금뿐이라고 생각한 미군의 명장 니미츠 대장 휘하의 용장 있었던 플래처와 지장 스프루언스의 기동부대가 무서운 투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일본군 측에서는 전혀 몰랐다. 또한 「대정보」의 면에서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격부대의 지휘관들은 x월 x일 이후의 우편물은 ‘미드웨이로 전송‘이라는 평문 전보를 칠 정도였으며 출격 근거지인 쿠레(吳 : 히로시마현 서남부의 항구도시)에서는 술집 여인들까지 ’다음은 미드웨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하니 일본군 정보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때는 부대가 집결했던 에토로후 성 히토갑푸(單冠) 만(灣)에서 출격할 때까지 함장 이상의 각급 지휘관과 주요 막료 외에는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비밀을 엄중히 지켰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이래로 일본군은 대적할 적이 없을 만큼 연전연승으로 작전을 마치자, 그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해 점점 거만해지면서 정보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기습공격을 가하려던 일본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미군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벼락같은 기습 공격을 받아 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히류(飛龍), 소류(蒼龍), 중순양함 ’미쿠마(三隈) 등 침몰 항공기 약 330기를 소실, 베터랑 파일럿 약 100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모든 것을 걸었던 야마모토(山本) 대장의 운명의 승부는 허망한 뜬구름으로 사라지고, 태평양에서의 해상작전은 그 양상이 완전히 바뀌어 미군이 해상권을 거머쥐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장수」와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장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전형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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