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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선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혜

 

 

 

 

칼럼

 

 

                선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혜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불교의 선(仙)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혜가 담겨 있다. 즉 불교의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子)이다. 선의 본질은 스승과 제자간의 생명이 서로 교차하는 것인데, 이는 문자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글과 말에는 의사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의미다. 어느 불교학자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불법문자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어느 선사는 ‘설명을 듣거나 읽고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되고, 본질을 먼저 직관적으로 파악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자를 글자로만 읽으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세월을 통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만물에 부처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참된 의미를 파악한 뒤에, 언어나 문자에 접해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어느 선사는 ’하늘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네 계절이 바뀌며 운행하는 사이에 만물은 셍겨난다‘고 하면서 ’소리도 향기도 없이 언제나 천지는 글자 없는 경전을 펼쳐 보인다‘고 말한다. 선(仙)에서 말하는 불립문자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빨갛고, 잎사귀가 푸른 것 그 모양 그대로가 진실이므로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새도, 짐승도, 꽃도, 바위도, 나무도, 풀도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현현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이러한 모습과 접하게 되면 자연히 시(詩)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시나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마음속에서 인간의 정서를 이끌어 내어 꽃과 새와 풀과 나무를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그대로의 존재 형성을 그대로 표현해 낼 수가 없다. 꽃은 말 없이 피어나고, 강물은 말 없이 흘러가고, 산은 말없이 수천년, 수만년 말 없는 속에서도 인간은 뭔가를 느낀다. ’유마경‘에서 진리를 앞 두고 묵연히 앉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경지를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침목이 우레와 같다‘고 말하는 어느 보살들처럼 말이다.

 

 

침묵이야 말로 우레와 같은 거대한 음성이라는 말은 위대한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침묵이란 ’말이 없음‘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의 소리지만 음계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만든 음악이란 인간이 창조한 음계는 8계 뿐이다. 그러므로 선의 불립분자는 이 8계의 음 밖에 있는 것이다. 한 수행자가 산속의 산사를 찾아와서 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선사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문는다. “자네가 이곳에 올 때 골짜기에서 개울을 건너는가?” “네 건넜습니다.” “그 개울의 물소리가 들리든가?” “네, 들렸습니다” “그럼 그 개울물 소리가 들린 곳에서 선에 들어가게, 개울물 소리를 듣는 것이 선의 첫걸음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법화경」을 읽고는 이렇게 읊었다. “봉우리의 색깔이며 개울물 소리, 모두가 부처님의 목소리와 모습이어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仙)에서 말하는 「불립문자」를 이해하는 생활 대토이다. 583년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철저히 탄압했다. 승려를 강제로 농민이나 병사로 내몰았고, 사찰을 귀족의 저택이나 군사시설로 전용했다. 불상은 모두 파괴되고 경전은 불태워졌다. 이 폭정에 항거하는 승려들은 죽임을 당했다. 겨우 탈주하거나 자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달마대사의 법을 이어 받은 혜가(慧可)선사도 양자강 근처로 피난했다. 멀리 장안의 종남산 산속 깊이 도망친 선승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살아갈 암자도 없고 읽을 경전도 없고, 불상도 없다.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기안에 있는 「부처님의」 확인하고 계발하여, 그것을 깨닫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법구경」에 「자신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어라. 남을 좇아 스승으로 삼지 말라. 스스로를 잘 닦아 스승으로 삼으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스승을 얻을 수 있느리라.」 불교 탄압으로 선사들은 기록의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선의 올바른 법을 선어(不立文字)를 통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어(仙語)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혜가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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