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권우상(權禹相) 칼럼 = 불교. 존귀한 인생이 되자

 

 

 

 

칼럼

 

 

                       불교, 존귀한 인생이 되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종교란 으뜸 종(宗)자에 가르칠 교(敎)이다.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의미다. 「으뜸」이란 다른 가르침과 비교하여 가장 뛰어나거나 수준이 높다는 의미는 아니며, 우주의 인생에 관하여 진실된 모습 그대로를 밝혀주는 절대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생이라고 하면 우주 생성의 근본적인 원인에서부터 모든 생(生)과 사(死)에 대한 진리까지 진실 그대로를 밝혀주는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고 연구나 관찰없이 무조건 믿는다면 맹신(盲信)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초기에는 인도 전역에 많은 종파들이 있었고, 종파마다 자기들의 가르침이 으뜸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때 어떤 사문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부처님, 여러 스승들은 모두가 자기의 가르침이 제일이라고 하니 어떤 가르침을 믿어야 옳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삼증(三證)하는 바의 가르침을 믿어라”고 하셨다. 물리적으로 증명되고(物證), 이치적으로 증명되고(理證), 현실적으로 증명되는(現證) 가르침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 종교인지를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를 일러준 것이다. 불교는 현실적으로 대부분 기복적(祈福的)인 신앙생활을 하고 사찰마다 기복적인 의식(儀式)이 일상화 되어 있지만 그러한 신앙 행위도 있어야 하는 소중한 방편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의 기도이든 간에 기도는 자비심을 싹트게 하고, 개인의 심성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의식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기도할 때는 선한 마음을 갖게 되며, 그 선한 마음은 기도하는 만큼 생활로 연결되는 것이며, 기도하는 마음이 생활로 연결되는 것은 미래의 복밭(福田)을 가꾸는 일이 된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중생제도를 위한 초보적인 가르침일 뿐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기가 멀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기복이 아니라 우주와 인생에 관하여 그 참된 이치를 가르치고, 생명의 진리까지 깨닫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기복의 신앙에는 진리라는 단어를 붙일 자리가 없다. 불교에서 「진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말은 생명의 근원을 밝힐 때만 사용하는 법어(法語)다.

 

 

우리 중생은 항상 자기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신을 기준으로 삼고 주위환경과 인연에 집착하므로 그 인식에 매달린 사고방식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 우리 중생이 느껴 알기로는 네 생명, 내 생명이 따로 있기에 사는 사람 있고, 죽는 사람이 있으며, 개별적인 생명이 따로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육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한다. 육신과 마음의 이별을 죽임이라고 한다. 육신을 운전하는 것은 의식이다. 갖고 싶은 마음, 기분 나쁜 마음이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나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가 된다. 부처님께서 생명의 근원인 마음자리, 그 진리를 깨닫고 보니 네 생명, 내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본바탕이 본래도 지금도 순수히 진공(眞空)하여 하나로 통하여 있음을 깨달으시고, 모든 생명은 하나요, 한 마음이라고 하셨다. 「진리는 하나다」라는 법어는 생명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표를 암시해 주는 교훈이며, 체험하신 바의 진리 그대로를 밝히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교의 자비는 기독교의 사랑의 의미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부여하는 의미의 폭은 다르다. 선행 또는 베푸는 행(行)을 불교는 「자비」라 하고 기독교는 「사랑」이라 한다. 그러나 자비의 사상은 천지만물이 동체(同體)라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기에 천지만물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과 기독교의 「구원」은 각기 자기 종교의 목적어이다. 깨달음은 자력에 의하여 성립될 수 있는 자기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신을 믿음으로써 그 신(神)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타력의 의미가 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관은 이성(理性)의 활용이다. 이성을 활용하여 우주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자 할 때만이 소중한 가치관은 활용될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노력할 때 참으로 존귀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에 끄달려 생활에 끌려가는 삶만을 고집할 때, 본능에만 끄달려 살아가는 미물, 곤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배너